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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환 시인 / 하늘이 높은 이유
하늘에는 해와 달과 별만 있는 게 아니란다
구름도 있고 무지개도 있다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올라가 계시다고?
물론 하느님과 부처님도 계시겠지. 하지만 네가 모르는 게 또 있단다.
하늘에는 커다란 슬픔이 있지. 보이지 않는슬픔들을 모두 담아내려다 보니 저렇게 크고 넓어진 거란다.
사람들이 가끔씩 하늘을 쳐다보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니?
사는 게 힘들고 슬퍼질 때마다 사람들은 하늘에다 슬픔을 퍼다 버린단다.
하늘을 원망하고, 그러면서도 하늘에 기도하는 건 사람이 스스로 이룰 수 없는 게 있기 때문이지.
흐릴 때도 있지만 하늘이 때때로 맑고 푸른 미소를 띠는 건 슬픔을 이겨내기 위한 자세를 보여주는 거란다.
하늘이 높은 이유를 이제 알겠니?
박일환 시인 / 노숙
새들이 숨기 좋을만큼 바람이 수런대기 딱 좋을만큼 제 몸을 넓혀보겠다고 나뭇잎들이 애쓰는 동안
나뭇잎들이 서로 얼굴 부비며 다정한 숲을 이루는 동안
숲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공원 벤치 위에 엽록소가 다 빠져나간 듯 누런 나웃잎 한 장 누워 있다
제 몸의 크기를 줄이며 뒤척임도 없이 잘 말라가고 있다
박일환 시인 / 공 차는아이들
공중으로 높이 솟구친 저 둥그런 공은 누군가 밀어낸 것이다 장딴지의 근육을 이용해서 힘껏 내지른 것이다, 그러므로 비명을 질러야 마땅한 저 공은 그러나 유쾌하게 보인다 새들보다도 가볍고 자유로워 보인다 어디로 날아가서 어디로 떨어지든 솟구침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저 둥구런 공은 땅으로 떨어져서도 기뻠에 겨워 몇 번이나 통통거리며 즐거워한다 공을 내지른 아이들도 그게 신이 나서 함성을 지른다
저 아이들이 오늘 밤 공처럼 등그런 지구를 마음껏 뻥뻥 차올리는 꿈을 꾸며 잠들면 좋겠다
박일환 시인 / 만두 빚기
엄마가 만두를 빚으신다 보기 좋고 먹기 좋게 빚으신다 만두가 터지면 안 되니까 만두소를 적당히 넣고 조심조심 둘레를 감싸신다
만두를 잘 빚는 엄마가 정작 나는잘못빚으셨나 보다 나만 보면 속이 터진다면서도 왜 그리 채우고 싶은게 많으실까?
엄마, 이제 그만 마음을 비우세요 저는 왕만두가 아니에요
-시집 <만렙을 찍을 때까지>에서
박일환 시인 / 시의 바깥을 거닐다
이 세상 수많은 시인이 꽃과 나비를 잡아다 시 속에 가두었는데 아직도 저렇게 많은 꽃과 나비가 어울려 놀고 있다
이 세상 수많은 시인이 바람을 잡아다 시 속에 가두었는데 아직도 저렇게 많은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다
이 세상 수많은 시인이 빗방울을 잡아다 시 속에 가두었는데 아직도 저렇게 많은 빗방울이 허공을 헤매고 있다
아무리 시가 많아도 꽃과 나비만큼, 바람만큼, 빗방울만큼 나뭇잎만큼, 파도만큼, 별만큼 많지는 않아서
시가 차려낸 밥상을 물리고 때때로 하늘을 올려다볼 일이다 하늘이 비치는 호숫가를 거닐어볼 일이다
거기서 아직 시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 가여운 벌레들의 울음소리를 만나고 올 일이다 만나서 함께 울고 올 일이다
박일환 시인 / 양반다리
내 고향은 충청도 멍청도라 불리기도 하지만 양반의 고향이라는 말도 있지 그래서 내가 양반다리하고 앉는 걸 좋아하는 걸까?
나는 순천 박씨 박혁거세를 먼 조상으로 하고 사육신의 한 명인 박팽년파에 속한다지만 아무래도 나는 우리 집 족보가 가짜인 것만 같아
비록 양반다리 자세를 좋아하긴 해도 상놈 출신이라고 해야 더 멋지고 당당할 것 같은데 시제(時祭)에 가서 두루마기 입은 어른들 보면 가짜 족보 아니냐는 말은 차마 꺼내기도 어려운 상황
양반다리 슬쩍 풀면서 조선 오백 년이 길었다며 한탄하고 양반다리 대신 책상다리라는 말을 쓰자고 해봤자 민중은 개돼지라는 출세한 자의 말 한마디에 무너지고 마는 형국
그러니 어쩌겠는가 개돼지임을 인정하고 한평생 엎드려 살며 사람이 개돼지보다 나은 게 뭐냐고, 중얼거리기라도 해야지 그렇게 개돼지에게 용서를 빌어야지
내가 용서받기 전까지 용서받지 못할 짓 하는 자들을 용서하지 말아야지
- 시집 < 귀를 접다>(청색종이, 2023)
박일환 시인 / 열일곱 나의 친구에게
세월호가 가라앉던 날 7교시에 방과후수업에 야자까지 정해진 일과는 빈틈이 없었다 어른들이 제일 먼저 달아난 선장을 욕하고 어른들이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며 탄식하고 어른들이 대한민국이 함께 침몰했다며 분노하는 동안 우리는 교실 안에 잘 갇혀 있었다 수학여행도 체육대회도 취소하고 교실 안에서만 지내라고 했다 며칠 후에 치러진 중간고사 때는 정답은 시험지 안에만 있다고 했다 안에 있는 게 안전한 거라고 했다 안에서 가만히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어른이 되겠지 어른이 되어서도 기다리겠지 무얼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가만히 앉아서 눈 감고 기다리다 보면 아,저기 누가 오고 있구나 반갑게 손을 흔들고 싶은데 돌연 컴컴하고 아득하고 검질기게 들러붙어 숨구멍을 틀어막는 이 괴물은 뭐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순식간에 4월16일의 진도 앞바다로 끌려 들어가는 악몽을 일상처럼 거느리고 살게 되겠지
이제 그만 밖으로 나오너라 어서 빨리 나오너라 부름의 시간은 언제나 너무 늦었고 야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내 친구는 어디로 갔지? 나도 모르게 중얼거릴지도 몰라 정답과 오답이 뒤바뀐 답안지를 들고 차가운 물속으로 하염없이 잠겨 들어간 친구야 친구야 친구야 부르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지도 몰라
너와 나는 똑같은 열일곱 먼 훗날 나의 열일곱을 생각하다 영원히 열일곱으로 남은 너를 떠올릴 테지 가만히 기다리라는 말,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그 말도 함께 떠올릴 테지 그때까지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친구야 친구야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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