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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미소 시인 / 다정한 겨울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6.
김미소 시인 / 다정한 겨울??

김미소 시인 / 다정한 겨울​​

 

겨울은 쓸모없다

기다리는 내내

젖은 발을 잊었으므로

바깥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

온통 하얗다

다정한 식탁이 있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밥그릇

마주 앉은 저녁의 얼굴은

얼마나 다정할까

나는 이별을 말한 적 없는데

이별은 쓸모없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창을 두드리지 못했다

다정해지기 위해

신발을 벗는 사람들

아무도 오지 않은

식탁에 앉아 발을 비빈다

 


 

김미소 시인 / 식빵

 

 

모서리를 간직한 사람

부스러기를 각혈처럼 뱉어내며

검게 타 버리는 사람

 

네가 흘리는 것은

신호일까 암호일까

 

딸기잼을 바르면 창백했던 것 같고

포도잼을 바르면 멍든 하늘

 

접시에 나란히 몸을 포개면

앞면은 누가 될까

누가 보호색이 되는 걸까

 

접시를 벗어나면

허기를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이빨 자국이 생긴다

 

알람이 울리면

너의 얼굴을 내려놓고

문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소멸하기 직전 하강하는 것들은

네가 흘린 독백일까

 

되풀이되는 일곱 시 반

식빵의 테두리를 뜯어내면

이건 또 다른 환생일까

 

나만이 궁금해하는 것 같은데

누군가 아무 생각 없이 나를 깨문다

 

 


 

 

김미소 시인 / 날개는 슬픔을 간지럽힌다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 다정하게 울었다

문고리가 없는 방,

거친 숨을 몰아쉬는 어깨를 들키지 않도록

문이 아닌 벽이라면 고립 아닌 은신

할머니 손에 자란 동생과

왜 차별받는지 이해하지 못해서

진물이 흐를 때까지 붉은

얼굴을 손톱으로 박박 긁는다

이대로 방치되고 싶은데

구멍 사이를 훔쳐보는 검은 눈빛은 소름 같은 것

소름은 벌레를 바라보는 적의 같은 것

털어내 버리고 싶은 감정

벌레를 향해 살충제를 뿌리면 어둠

가장 깊고 따듯한 곳으로 추락하는 날개

(나도 같이 마셔 버렸나?)

입김 사이로 눈앞이 흐려지는

물안개의 꿈을 꾸고 있나

죽은 것들을 외면하는 생(生)

 

-시집 『가장 희미해진 사람』, 걷는사람, 2022

 

 


 

 

김미소 시인 / 재

 

 

재를 뒤집어쓰고 누웠다

 

멀어지는 날개를

놓아주었다

 

나무 사이로

슬픔이 타오르는 것을 지켜보며

 

우리는 포옹을 하고

서로의 깃털을 다듬으며

 

가장 먼 곳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성홍열이 지나간 자리를

불어 주는 검은 얼굴이 되어

 

 


 

 

김미소 시인 / 먹을만큼 먹었고 잘 만큼 잤다​

 

불치병을 가지고 태어나 평생을 골골댔지

세비체 다이너 타말리 라클레트

죽기 전에 꼭 먹어 봐야 할 음식

처음부터 먹어본 적 없으니 그리울 일도 없다

피자 치킨 탕수육 냉면 족발

그래, 먹을 만큼 먹었다

가서 좀 쉬지 그러니?

잠은 어차피 밤에도 자는걸요

영원한 잠에 대해 생각한다

적당히 행복하게 살다 가면 그만인 것을,

칼 한 자루 숨기고 살았나 보다

엄마의 심장을 찔렀나 보다

나를 왜 낳았느냐고 말하지 못하는

슬픔

구멍이 커지는지도 모르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칼이 아닌 총이었나?

걸음마다 재가 쏟아진다

마른 울음을 우는 걸까

가슴이 무너지는지도 모르고

등을 구부러뜨린 엄마는

덤덤하게 비질하며 항생제를 수거한다

 

 


 

 

김미소 시인 / 혼자만의 길

사람과 사람 사이를 빠져나와

어둠 속으로 얼굴을 은닉한다

나는 무거워진 사람 무서움의 진화일까

혼자 있는 방이 더는 가볍지 않아

밤이 되면 벽에 걸린 옷이 유령 같았다

눈이 없는 유령, 눈을 찾는 유령

나는 이미 한쪽 눈을 잃었으니

지퍼를 열면 더 깊은 슬픔의 포자가 날아와

눈앞을 흐리게 하는 겨울을 생각한다

아름다운 눈발은 멀리 있구나

엄마의 멀어지는 발자국이 보이지 않아

닦이지 않는 시간을 향해

오래도록 주머니를 움켜쥐고 서성였던

잃고 나면 아름다운 것들

나의 새벽은

나침판이 되어 사랑을 헤매는 것

혼자만의 길이었을까

염소 떼가 사라지고

우는 소리만 우는 사람을 피해 돌아왔다

 

 


 

 

김미소 시인 / 가장 희미해진 사람

​1

 

 엎질러진 사람의 붉은 윤곽, 페트병을 열면 공중으로 솟아나는 병뚜껑의 악력, 방치된 소변을 흘려 보내고 허무처럼 투명해진 빈 병과 불투명한 병명, 오래 바라보았을 벽을 생각한다 벽은 불러 보고 싶은 이름일까 회한回翰일까 창은 바라보기 위한 도구가 아닌 걸까 번개탄을 태우고 잠에서 깰까 칼 한 자루를 옆구리에 놓아두었던 당신, 육체를 해체시키면 고립은 오래도록 녹아내린다 환상통은 지속되고 식도는 관이 되어 벌레를 받아들인다 어둠을 밀어내며 벌레는 무럭무럭 자란다 슬픈 부위를 갉아먹고 한 사람의 얼굴을 지운다

 2

 나는 괜찮습니다 흐린 날의 바깥을 상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기 때문입니다 모래 위에 꾹 눌러쓴 이름이 흩어지던 것을 기억합니다 바닥이 씻겨 내려갈 때 우리가 묻어 둔 조개껍데기의 무늬가 선연합니다 빗속에서 꺼억꺼억 울었습니다 비를 껴안으며 잊히는 사람의 얼굴을 깨진 거울처럼 맞추어 봅니다 틈이 많아지면 운동을 멈춘 사람 같습니다 뼈의 공백은 채울 수 없는 무덤, 사람의 부재가 그렇습니다 손이 닿지 않아 커튼을 치지 못했습니다 무기력한 목덜미에 햇살이 내려앉았습니다 오래도록 열기를 느꼈습니다 우는 장면이 들키지 않도록 얼굴이 녹아내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가장 희미해진 사람에게 오래도록이라는 말이 더는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김미소 시인

1989년 충남 서산 출생.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9년 제8회 『시인수첩』 신인상 등단. 시집 『가장 희미해진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