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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설빈 시인 / 너무 멀리 태어났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6.
이설빈 시인 / 너무 멀리 태어났다

이설빈 시인 / 너무 멀리 태어났다

 

​이름으로부터

너무 가깝게 죽어간다

메아리로서

서로에게 호소한다

내 이파리를 속여줘 뿌리부터 헐벗겨 줘

빛을 비트는 물결처럼

장작을 무너뜨리는 불티처럼

나는 더 넓게 걷는다

나 자신들의 난파로

새벽까지 떠밀려온 낯선 구두처럼

목을 울리고 입을 움직여 "나"

라고 말한다 그때마다 '나'는

아, 아 ··· 귓전에서 표류한다

구두 속에 물결치는

낯선 해변처럼

여긴, 너무 좁다

발 디딜 수 없을 만큼

너무 자세하다

눈 감아야 겨우

입을 열 공간이 생길 만큼

지금, 내가 없는 곳에서

나를 되비추는 파편들이

내 몸보다 나를 잘 이해한다

화약에 뿌리내린 식물처럼

그 파편들의 현재는 조심스럽다

여기서 가능한 사건은

책장을 넘기는 바람

다시 배열되는 호흡뿐이라는 듯이

우리는 낙엽으로 사유하고

꽃으로 퇴행했다

흙에 가까이

더 기꺼이

너무 늦게 태어났다

생으로부터

너무 느리게 잊혀진다

삶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닮아간다 깨져 나간 돌이

깨져 나온 돌을 돌아본다

익숙하고도 낯선 얼굴이여

밤은 멀리서 오지 않는다

거기서 넘어진다

그늘을 밟은 자리에

누우면 입술의 높이는 모두 비슷하므로

여기서 엎질러진다

눈꺼풀의 깊이는 모두 다르므로

눈을 감았다, 뜬다

창문이 열렸다, 닫힌다

커튼이 부풀었다,

가라앉지 않는다 너는

나를 돌아본다

얼굴은 어떻게

머리를 초과하는가

접힌 모서리가 밝아진다

한 세계의 다른 음계가

천정도 눈꺼풀도 없는 꿈의 현재가

지느러미의 색깔을 바꾼다

눈빛은 어떻게

빛을 초과하는가

여긴, 너무 밝다

눈 감아도

한 번 더 눈 감아야 할 만큼

너무 희박하다

너의 호흡에

나를 나눠 담아야 겨우

생을 말할 수 있을 만큼

 


 

이설빈 시인 / 빙점(氷點)

 

 

 이곳은 아무리 지나쳐도 강조되지 않는다

 

*

 

 욕조가 없고 창문이 없고 절정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나는 또 지나친다 조심해야 한다 내가 딛고 선 빙판이 투명해질 때를 조심해야 한다 내가 딛고 선 꿈이 수위를 높일 때를 너무 많은 심증은 초점을 부러뜨린다 네 탓이오 네 탓이오 너의 큰 탓이다 그러므로 가파르게 책망하오니…… 이 밤의 심지는 깎여나간다

 

*

 

 빛의 탄주彈奏는 눈앞을 컴컴하게 만든다 이곳에서 소금은 고향을 잊는다 이곳에서 낙엽은 스스로 썩지 않는다 이곳에서 물방울의 세계는 다시 한 번 뒤집히고 중력은 잠의 머리채를 잡아챈다 그리고 검고 매끄러운 벽돌이 구워지고 벽돌은 어떤 색유리보다도 성실하게 빛을 상영한다 이곳에서 방아쇠는 당겨지지 않았으나 메아리는 그 죽음보다 많은 뼈들을 일으켜 세우며 끌려간다 시간 밖으로 호명할 수 없는 날씨 속으로 기억의 구멍은 저벅저벅 뚫리고 그 숨통을 매듭지을 구두끈은 언제나 모자라다 이곳에서 방충망은 벌레와 문자를 구분 없이 거르고 부들부들 기도문을 읽으면 악몽은 기도문을 거꾸로 뇌까린다 코앞에서 마주 보는 거울 속에서 그 누구도 마주보지 않는다 그곳에서 유한은 무한을 함부로 다루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으리라 나는 촛불을 불어 이곳을 구기고 싶다 저편에서 유언을 적지 못한 하늘이 날마다 자신을 번복하듯이 나는 아무리 깎아내도 강조되지 않는다

 

 


 

 

이설빈 시인 / 눈송이는 많은 복도를 가졌다

 

 

창문에 눈송이가 붙어 있다

 입을 벌리고

 아무도 없는

 복도를 들여다보고 있다

 

 내 눈도 눈송이를 들여다본다

 두 눈에서 맥박이 뛰고

 번갈아 발소리가 녹아든다

 

 내 눈은 나보다 오래 깨어

 복도를 서성인다

 

 눈송이는 많은 복도를 가졌다

 

 밤새 얼굴을 감싼 손에

 햇빛보다 부드럽고 환한

 진흙이 묻어 나온다 진실을 털어놓을 때마다

 복도의 문이 열린다 지나쳐온 의문과 지나치게 가까운 질문이

 한 몸으로 나를 호흡한다

 

 녹아내릴 것 같아 그렇다고 창문을 열면

 눈이 달라붙겠지 온몸에 발소리가 번지겠지

 복도는 많은 문을 가졌다 그보다 더 많은 창문을

 계속 닫고 있을래?

 

 복도에 불이 들어온다

 언제까지 눈을 뭉칠래?

 

 불이 나간다 창문에 복도를 열고

 두 눈은 번갈아 발을 내디딘다

 복도 안팎으로

 눈발이 날린다

 

 눈송이는 많은 복도를 가졌다

 

 창문은 더 선명한 복도를 바란다

 

 복도는 더 적은 입김을 가져야 한다

 

-계간 《문학과사회》 2023년 여름호

 

 


 

 

이설빈 시인 / 숨 숲 수프

 

 

개구리를 토해 낸 뱀이 개구리의 어두운 허기로

쉬이익— 빨려 들어가듯

벌목꾼은 숲으로

 

붉은 책갈피를 펼쳐보는 저녁,

배꼽의 태엽을 거꾸로 돌려보면

나는 그녀의 배 속에서 소화되는 것처럼 보이겠지

 

갑자기 수면 위로 끌어올려진 심해어의 눈알처럼

인광을 내뿜는 무수한 저녁의 육체들

신경이 퉁퉁 불어서

 

근육질의 구름

우르릉우르릉 비석을 갈고 있다

벌목꾼은 검은 매왈츠*를

 

이제 검정 크레파스를 긁어내면 무지개가 맺힐 겁니다

그건…… 그건 살색이에요!

비명이 울창하던 노을

 

반달도끼로 도려낸 숲의 싱싱한 내장들

 

검은 책갈피를 펼쳐보는 새벽

감전된 새가 창백하게 짖었다

무딘 도끼날에 베어오는 소름

벌목꾼은 늪으로

 

쥐 먹은 자리를 에워싸는 머리카락들처럼

한데 모여 늪을 끓이는 침엽수들

개구리들의 눈빛을 모아 독기를 푼다

 

머리통은 예리한 발톱에 꿰여 지붕 위로

몸통은 덕지덕지 크레파스 늪 속으로

 

개구리 배 속에서 꾸역꾸역 자라난 뱀은

개구리—허눌을 벗는다

벌목꾼은 검은 매 왈츠를

 

 


 

 

이설빈 시인 / 유원지는 어색하고 피곤하다

 그것은 산책과 간식이라는 단어와 닿아 있어 내 꼬리를 흔들지만, 고개를 쳐들고 침을 흘리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원지가 아니더라도, 나는 담장의 고양이에게 짖지 않는다. 날아가는 새를 향해 뛰어오르지 않는다. 두더지를 쫓아 땅을 파헤치지 않는다. 내 꼬리를 잡아당기는 아이들을 제외하고. 그곳이 유원지더라도.

 유원지. 도무지 아이들은 지겨워하지 않는다. 개미 발자국처럼 보이지 않는 점선을 따라 다른 차원을 접고 펼치며 놀이와 함께 빛난다. 그것이 유원지의 기능, 유원지의 특성이다. 하지만 유원지의 자긍심이 될 수 있는지 따지는 건 놀이 바깥의 몫이다.

 유원지는 어색하고 피곤하다. 아이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지쳐 늘어져 있다. 각자의 지침을 납득하기 위해 모인 것처럼. 나는 잠자코 엎드려 그들의 지침을 장식한다.

 지침. 지침? 지침… 그는 마지못해 나를 쓰다듬는다. 그의 이름을 나는 모른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는 무엇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놀이기구와 벤치, 아이와 어른 그리고 자신에게조차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애쓸수록 모두가 어색하고 피곤하고 우스꽝스러워진다. 무언가와 어울리려면 잡아당길 목줄이나 꼬리가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유원지에 기대어 유원지를 시험하며, 무엇과도 어울리지 않는 놀이의 지침을 따를 수도 있다. 꼬리가 흔들린다. 나는 그 놀이가 마음에 든다. 꼬리잡기를 제외하고. 그래, 어쩌면, 그는 꼬리가 떨어졌을 것이다. 한 아이가 꼬리를 너무 세게 잡아당겨서. 그래서 목줄을 끊고 그 아이를 뒤쫓다가 유원지의 그가 된 것이다. 꼬리가 멈춘다. 나는 이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마도, 꼬리가 흔들리는 대로 그는 아이들과 어울리며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아이를 부르면 다른 아이들이 나타나고, 아이들을 부르면 한 아이가 사라지고, 마침내 저녁이 되어 응답하지 않던 아이들만 남아 저마다의 헐렁한 목줄을 잡아당기게 된 것이다. 그래, 그는 그 시간에 매여 있는 것이다. 꼬리가 흔들린다. 나는 이 생각이 마음에 든다. 흔들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는 하루 종일 맴돌 수 있다. 꼬리를 떼어 가는 아이만 없으면.

 

 저녁의 유원지. 어색함과 피곤함 그리고 지루함의 변두리. 여기에는 낮고 넓은 무덤, 그 무덤을 둘러싼 화단, 그 화단에 꽂힌 작은 팻말이 있다.

 

─화단에 들어가지 마시오.

 ─나는 바보다.

 

 그것은 이곳에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담장의 새끼줄처럼 그어진 선을 따라서 화단과 자신과 무덤을 보이지 않는 목줄로 연결한다.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는 팻말 앞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지우고 중얼거리며 시간을 보낸다. 시간을 보낸다? 시간을 잡아당긴다. 나는 그가 잡아당긴 시간을 어슬렁거리다가, 그 시간이 팽팽한 공간으로 펼쳐지면 그를 잡아당긴다. 그러면 그는 흔들리며 내 꽁무니를 따라 걷는 것이다.

 그렇다. 그는 꼬리가 되고 싶은 것이다. 나는 그 소망이 마음에 든다. 흔들리는 꼬리, 이름과 목줄 없이도 아이들을 불러 모으는 꼬리가… 흔들린다.

 

나─꼬리─그─나─꼬리─그─나─꼬리─그─ 나─꼬리…

 

 그것은 입과 말이라는 단어와 닿아 있어 내 머리를 흔들고 나 자신을 뒤쫓게 한다. 그러나 유원지가 아니더라도, 나는 바보에게 으르렁거리지 않는다. 나는 유령에게 달려들지 않는다. 그래, 나는 나를 읽는 너를 물지 않는다. 꼬리와 꼬리를 떼어놓는 것들을 제외하고. 그곳이 유원지더라도. 화단이더라도. 내 무덤이더라도.

​​

-월간 『현대시』 2022. 8월 호 발표 후 수정

 

 


 

 

이설빈 시인 / 전조

 고개를 들면 밤의 해바라기밭, 검은 씨앗들의 방언이 빼곡하다 머리카락처럼 살아 있는 뿌리는 그보다 월등한 시체를 향하지 밤이 오면, 우리는 더욱 현명해지리라 밤 아닌 것들과 함께

 번뜩이던 창문에는 얼마간 다른 빛이 깃들어 자신이 헤쳐 지나온 건초지 , 불길에 사로잡히는 울타리를 바라본다 하나, 둘......

 메시지가 닿을 즈음이면 그곳에도 사막의 사인이 젖어들겠지요 이곳에는 별들이 많아요 그리고 암혹보다도 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씨앗 보다는 흙을 기르는 존재에 가깝습니다

-시집 《울타리의 노래》 중에서

 

 


 

 

이설빈 시인 / 그럼 내가 웃어야 하나요?

 

 

한참이나 의자를 끄덕이다

그대로 꺾여 넘어졌습니다

마주앉은 사람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혼자서도 참 잘 다치시네요

그럼 내가 울어야 하나요?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돌아서기 좋은시간에

말없이, 발둥만 바라보던 사람이 기뻤겠나요?

이마에서 쏟아지는 서랍과 그을리는 입술을

턱도 없이, 가느다란 미소로 닫아걸었겠지요

수척한 구두 주름 따라 스며드는 빗물처럼

바닥도 없이 바닥으로 젖어드는 높이를

굽은 목으로 받치고 있었겠지요

이토록 분별없는 골목과 가로등

나는 정말 혼자서도 잘 닫히는군요

잘도 건너뜁니다. 웅덩이마다 건물 꼭대기

점멸하는 경고등-솟구치는 담뱃불에서

이 행성을 점쳐보는 건 감상적인 일

그만 들어가봐요 품었던 곳이 있다면

제 옆모습이 쉬운 사람은

수족관 물고기와 입을 맞추고

제 뒷모습이 미운사람은

돌아와 커튼을 밖으로 내걸고?

한번 그려봐요.

무엇을? 그런 의문은 옷걸이에 걸어두고

그러나 옷걸이는 물음표에 매달린 삼각형

커다란 옷장속 별세계, 가로놓인 횃대와 선로와 전선과

그 모든 순환의

환원의 주기를 따라서

 

달은 져주고

해는 떠주고

돌아가주기 좋은 시간에

문 앞에 돌려세운 구두를 신고

갑시다. 어디로? 그런 의심엔 리본을 묶고

바라던 대로 쉽게 가요

봄에는 가을 옷을 입고

가을에도 가을 옷을 입고?

가을은 앞서가고

봄은 봅니다

 

여길 봐요

내 바닥에 닿은 꽃들은 언제나 울상입니다

혼자가 아니잖아요, 울지 마요

그럼 내가 웃어야 하나요? 그러나

살아있던 것들은

살아남아있어요

 

-시집 <울타리의 노래>에서

 

 


 

이설빈 시인

1989년 서울에서 출생. 강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2014년 제14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시문단에 데뷔. 시집 <울타리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