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훈 시인 / 미탄사지에서
사랑을 잃은 것은 내 안의 가난을 가누지 못한 탓이라고 깐돌 하나 집어내듯 말했지만 그게 구차하고 맹랑한 핑계인 줄 미탄사지에 와서 생각한다. 쭉정이만 남은 벼는 꿀릴 게 뭐 있냐며 섰고 논배미에 앉은 석탑은 천 년 돌에 새로 뗀돌을 붙접하고 섰으니 이런 걸 궁상맞다고 하는 건 못난 사람의 억측일 뿐이다. 들녘에 어슷비슷한 벼 이삭이 수런수런 재깔이는 사이 논도랑에 고만고만한 고마리 꽃이 홍조 띤 얼굴로 마주하는 사이 석탑은 들바람 부려 놓고 잠잠한데 돌 하나 세우지 못하고 돌 하나 허물지 못하는 내 안의 가난과 그 가난을 속상해 하는 마음까지 달게 삼키는 미탄사지味呑寺址를 경주 발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지난다.
*경북 경주 구황동 소재
이동훈 시인 / 개를 위한 변명
먹지 못하면 개꽃, 반반치 못하면 개떡, 시원찮으면 개꿈이다. 어엿한 새끼도 개를 앞에 두고 욕을 보인다. 남의 족보를 허락 없이 가져가서 개망신 주는 꼴이니 개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다 할밖에.
굴러먹다 온 개뼈다귀 출신이 개수작 부린다고, 개똥도 모르면서 병나발 개나발이라고 닦아세울 것 같으면 개구멍이 다 그립고, 있지도 않은 개뿔로 창피를 주니 개 낯짝도 붉어질 지경이다. 저들끼리 남남하다가 새판 짜고 이판사판 몰려 딴판 벌리더니 개판이란다. 죽 쒀서 개 준 꼴이란다. 개 말로 죽이라도 한 술 떴으면 덜 억울할까.
개소주 대러 개장수 나서는 인기척이 이보다 슬플까. 당겨진 개줄 같은 긴장이 이보다 싫을까. 털레털레 마을돌이 나설 때면 개나리 푸지게 늘어서서 개털끼리 좋은 봄이라며 노란 입술 비비는 것이다.
-시집 <엉덩이에 대한 명상> 문학의전당
이동훈 시인 / 다락이 있는 풍경
다락의 목록은 간단하다. 앞자락이 뜯긴 비키니 옷장 하나, 그 안에 요긴하진 않으나 버리기는 뭐한 유행 지난 헌 옷가지들. 옆구리 터진 라면 박스, 그 밑에 다시 읽을 것 같지 않은 바둑 입문이나 권법 수련 책, 그 위에 개근상 삐져나온 졸업 앨범에다 권수가 안 맞는 무협지 몇 권. 철제 책상의 아귀 틀어진 서랍, 그 안에 이제 연락을 끊은 사람들의 편지까지.
다락의 목록을 추가한다. 어둠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의 작은 창, 그 창을 통해 보이는 건넛집 불빛에 얼씬하는 그림자, 그로 인해 놀게 되는 가슴. 베개를 꺾어 가슴에 괴고 엎드릴 때 머리카락에 닿는 서늘한 장판, 등을 대고 돌아누울 때 창밖으로 지나는 높쌘구름, 볼을 적시던 눈물 한 줄기, 기척 없이 있어야 들리는 쥐 발자국 소리까지.
나무계단 위 공중에 잇대어 달아놓은 높고 외로운 자리, 백세각*에 와 다락의 목록에 꿈을 적는다. 불운한 시대와 맞서려는 더워진 말들이 문풍지에 남아 울 때 요람처럼 아늑하고 시래기처럼 존득한, 저녁놀 타고 붉게 번져가기도 하고, 마법 양탄자처럼 하늘을 날아가기도 하는, 지금은 잃어버린 그 꿈을, 다락이 있는 풍경이 조금씩 흔들어주고 있다.
*백세각: 경북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소재. 여기 다락방에서 독립운동을 논의했다고 함.
이동훈 시인 / 소걸음
바쁠 게 뭐가 있겠어요. 약삭빠르게 잇속 챙기는 재주 없이 어깃장 놓고 실속 챙기는 주변 없이 부지런 떨지 않아도 갈 길 가고 할 일 하며 그저 뚜벅뚜벅 걷는 것이지요. 나의 든든한 맹우* 나무그늘에서 느릿느릿 되새김질한 시간이 집채만큼 덩치를 키우고 불뚝하게 뿔을 세웠지만 진짜 믿는 구석은 비탈밭도 묵정밭도 도랑물도 붉덩물도 예사로 흔덕대며 뚜벅뚜벅 걷는 것이지요. 어쩌다 위아래 치는 꼬리질이 툭툭 던지는 농담 같아 한세상 건너는 구색은 된 것이지요. 당신에게 가는 길도 나에게 오는 길도 소걸음이면 좋겠어요.
* 최북 ‘맹우도(猛牛圖)
이동훈 시인 / 길 끝 보리술집
아주 이르거나 웬만큼 늦은 퇴근이면 한 번쯤 옆길로 새고 싶다. 지끈대는 길거리, 호객하는 밤거리 지나 이정표 없는 길로 무작정 걸어가고 싶은 거다. 길거나 짧은 골목을 빠져나와 묵정밭과 도랑물 사이를 걷다가 막다른 길 탁자 하나에 빈 의자만 얌전한 구석지고 막막한 술집에 닿고 싶은 거다. 고춧가루 듬뿍 친 번데기 안주에다 보리술 한 양동이 받아 두고 빈 의자에 어울릴 이름을 불러내고 싶다. 번데기가 불쌍하다며 훌쩍일 박용래 자기 술은 소주로 바꿔 달라는 김종삼 뒷자리 술값과 여비를 요구하는 천상병 나무젓가락으로 번데기 국물 찍어 낙서하다가 기침을 터뜨리고 마는 이상 그 기침까지 따라하는 박인환 김일성 만세할 자유를 중얼거리는 김수영 막다른 집에 몰려 저마다 시끌시끌하다가 들을 거 조금 듣고 흘릴 거 아주 흘려서 가벼워지고 싶은 거다. 길 끝 집이 좋았다고 이상이 인사라도 할 것 같으면 길에도 끝이 있냐며 번데기 앞에 주름잡듯 보리술 냄새피우고픈 거다. 출근길이 퇴근길인 일상에서 벗어나 아주 가끔은 옆길로 빠져 길을 잃었으면 할 때가 있다. 길 끝 보리술집에 앉아 만화책 찢어진 뒷장처럼 궁금해지는 이야길 좇아 오래 홀짝이고 싶은 거다.
- 《시인동네》, 2017.6.
이동훈 시인 / 찔레
찔레는 산 비탈면에서 내려오고 길은 찔레를 안간힘으로 밀어낸다는 어쭙잖은 생각이 여자의 분내, 땀내로 어질병 앓던 어느 해 초여름에 가 닿는다 새치름히 돌아서 있어도 틈을 주면 와락 무너질 거라고 연신 터지는 찔레 향에 빠져 지분지분대던 나비 시절이었다. 속절없이 꽃은 지고 가려진 길은 트였지만 깊숙이 찔린 가시는 여름이 몇 번 지나도록 빠지지 않았다
찔레 향 폭격하는 어스름 찔레 그늘로 온, 그 옛날의 여자 길 끝에서 화르르 찔레와 붙더니 자취 없다.
이동훈 시인 / 약초캐는 사람
언젠가 일 없는 봄이 오면 약초 캐는 산사람을 따라가려 해. 짐승이 다니는 길로만 가는 그를 안간힘으로 따라붙으면 물가 너럭바위 어디쯤 쉬어가겠지. 버섯이나 풀뿌리 얼마큼을 섞어 근기 있는 라면으로 배를 불리면 마른 노래 한 소절이라도 읊게 될 것만 같아. 볕에 그을린 몸이 단단해지고 비탈을 평지처럼 걷게 되면 약초 이름도 더러 외게 되겠지. 외운 만큼 곁을 주는 건 산 아래와 다르지 않을 거고. 장마 지는 날엔 화전민 움막에 나란히 앉아 그리운 것들을 빗물로 내려 보내고 산안개 따라 도리바리 울음이라도 들릴라치면 경건한 묵상에 빠지기도 하겠지. 이따금 장터에 내려서서 도매로 물건을 넘길 때 축농증 앓는 둘째를 위해 효험 있다는 약초를 따로 챙길 것이고 어디론가 송금이 끝난 그도 술 한 잔 받아줄 것이기에 한나절, 구름처럼 둥둥 떠 있게 될 거야. 언젠가 일 놓는 봄이 오면 그 누군가를 위해 약초 캐는 사람이고 싶어.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민숙 시인 / 겨울숲 외 6편 (0) | 2026.01.05 |
|---|---|
| 나병춘 시인 / 라다크 가는 길 외 6편 (0) | 2026.01.05 |
| 김경철 시인 / 한숨보다는 웃음으로 외 6편 (0) | 2026.01.05 |
| 김락 시인 / 어디에 있는가 외 6편 (0) | 2026.01.05 |
| 권상진 시인 / 바닥이라는 말 외 6편 (0) | 2026.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