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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철 시인 / 한숨보다는 웃음으로
어릴 적에는 어른이 되고 싶었지 하고 싶은 거 전부다 할 줄 알았는데
어른이 되어 맞닥뜨린 세상에 머리는 서리가 내리고 몸뚱이는 고장이 나버렸지
무엇을 위해 나는 살았을까 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때는 순서가 하나 없는데
한숨보다는 웃음으로 천천히 즐기며 남은 인생 그렇게 그렇게 살다 가리
김경철 시인 / 괴물의 눈 -암흑의 요염한 보석 그리고 우주에 버려진 자아
빛. 그것이 괴물이 품고 있는 독이었다. 좀 더 부연설명하자면, 나는 괴물과 나란히 산책할 수 있는 영광을 가상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은 죽음이니, 시공간이 없는 암흑의 요염한 보석을 끝내 떨쳐낼 수 없다. 암흑의 요염한 보석은 다름 아닌 괴물의 눈이다. 괴물의 눈은 빛으로 가득하다. ; 나는 우주에 버려진 자아로 그 괴물의 눈을 바라볼 수 있다.
ㅡ『시인동네』(2019, 2월호)
김경철 시인 / 정물의 세계
1 소음의 세계가 사리지고 정물의 세계로 걸어 올라간다.
산정에서 본 도시는 유령 같다.
그 많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건물뿐이다. 나무 하나하나가 보이고 숲의 세계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사라진다.
2 산정과 도시의 거리가 매화나무가 그려진 꽃병과 나의 거리다.
소음과 정물 사이에 거리를 나는 매화나무가 그려진 꽃병과 나 사이에서 본다.
혹 매화나무가 그려진 꽃병으로 걸어 들어가면 이 세계도 조화분청이 될까.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고 보이던 세계가 보이지 않는다.
정물의 세계는 아늑하다. 두루마리구름이 흐르고 마흔 일곱 계단을 밟고 내려온 빛과 강물이 하프를 연주하고 가끔씩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내가 사랑했던 한 여자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내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세계 는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나는 정물의 세계에서 정물의 세계를 징검다리 밟듯 건넌다. 징검다리 사이로 세찬 물살이 흐르고 우리는 그 물살을 건넌다.
걷는 발걸음의 속도가 이 세계를 본다. 빠른 자는 느린 세계를 보지 못하고 느린 세계에 사는 자는 빠른 세계를 보지 못한다. 우리를 가리고 있는 장벽은 속도와 거리에서 발생한다. 속도가 만들어낸 정물의 세계는 거리와 함께 시시각각 달라진다.
정물의 세계로 사라진 사람들은 정물의 세계로 등산을 마치고 나온다.
3 매화나무가 그려진 꽃병으로 걸어 들어가기를 나는 주저한다.
세계는 흰 유약으로 발라진 바탕에 매화나무가 전부다. 귀얄 붓으로 그려진 이 세계는 알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세계는 늘 두렵고 설렌다.
사람이 사람에게서 멀어지면 인상印象의 세계가 된다. 내 기억은 인상화석印象化石이 된 매화나무다. 매화 꽃잎이 떨어지고 나는 바람이 내뱉은 무언을 듣는다.
말을 잊고, 사회적 약속을 잊고, 내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을 잊었다. 내가 아는 모든 것들을 내가 알지 못한 세 계에서 버렸다. 아니 잊었다. 너무 오랜 세월이 매화나무 한 그루만을 봤다. 나는 인상印象의 세계를 빠져나오지 못 할지 모른다. 고요와 정적이 정물의 세계를 보호한다.
내가 잊었던 세계가 정물이 된다. 매화나무 그려진 꽃병에서 본 이 세계는 말 없다.
-계간 『열린시학』 2009년 겨울호 발표
김경철 시인 / 미로
미로는 길 안에 갇혀 있다. 미로를 벗어나는 길은 미로 안에서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미로 안에서 길을 벗어나야 한다. 고로 길에서 벗어나야 한다. 길이라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길이 아닌 곳이 바로 답이다. 미로의 답은 길이 아닌 곳이 길이 된다. 허공도 길이요, 벽도 길이다. 사방이 다 길이다. 고로 미로는 없게 된다. 막힌 모든 길이 뚫린다. 혹 미로에서 길을 찾았다 해도 수많은 사람이 다시금 미로 안에서 길을 잃게 될 것이다. 미로는 길이 아닌 길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수많은 길들이 있지만 모든 길들이 길일까 하는 의구 심만 갖게 하는 길이다.
김경철 시인 / 택시미터기 안에 뛰고 있는 저 말
혹, 도로 너머, 광야가 펼쳐졌다면 택시미터기 안에 뛰고 있는 저 말은 몇 천 킬로미터라도 상관없다는 듯이 내달렸을 것이다 초목과 유목민이 사는 몽골 어디쯤, 흙 속에 움트는 씨앗처럼 몽골 고원지대를 소원했을 것이다
나침반처럼 자장 끝을 매섭게 노려보는 저 말, 말 등잔이 몽골 알타이에서 고비알타이로 이어진 산맥처럼 씰룩이며 울란바토르의 젖줄, 툴강이 생각난 듯, 처음 켜는 시동처럼, 온 몸을 부르르 떤다
과열된 엔진처럼 부동액을 끌어올리며 전생에 한 번 스쳐온 듯한 그 길, 그 고원, 그 광야를 떠올리면서 수백 억 년에 걸쳐 묻어두었던 원유를 뽑아 올리면서 화염처럼 뜨겁게 심장을 달군다 신호도 없고 경계도 없는 그 광야로 택시미터기 안에서 뛰고 있는 저 말은 한없이 뛰어간다
마침내 택시 그림자가 택시를 박차고 달려나간다 도로 너머 광야가 펼쳐진 듯 택시 한 대가 눈동자 속 터널을 빠져나간다
김경철 시인 / 수선화
내게로 다가와 누군가가 말을 하는데 세상에서 피는 꽃 중에 수선화가 가장 좋다고 환하게 피어있어도 그리 본 적 없고 피어있다 한들 이름도 모르던 꽃 가녀린 허리에 노란 머리로 물들이고 예쁘게 피어있는 그 이름 수선화 춤추듯 한 올 한 올 흔들리는 너의 몸짓에 시간이 갈수록 빠져드는데 너였니 너였구나 너여서 그리 예뻤구나
김경철 시인 / 삶아 삶아, 내 꽃씨를 갖고 날아가는 삶아
누군가를 잊고 또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죽기보다 못한 굴욕일지도 모른다 욕하지 마라 굴욕보다 못한 삶을 사랑만으로 살기에는 너무 벅찬 삶이 있었다고
기러기 날아가는 십일월의 끝 또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누군가를 잊는 것 삶아 삶아, 내 꽃씨를 갖고 날아가는 삶아 또 누군가를 만난다면 진정 삶은 니안에 있었다고 자주빛이었을 때 우린 행복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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