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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윤순 시인 / 아홉 개의 달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5.
강윤순 시인 / 아홉 개의 달

강윤순 시인 / 아홉 개의 달

 

 

공만 있는 구장에 공들이 모여있다

공은 관중석 아래 중어로 된

광고문에 없는 듯 걸려있다

전광판 안에서 바랑바랑

소리를 쏟아내던 람보기니가

바람과 기대와 함께 식어있다

출가식처럼 홈 플레이트에서

108개의 실밥으로 날아올랐던 공

타자는 한방을 노리며 공을 쳤다

관객은 막대풍선으로 허공을 치며

주문처럼‘컴백 홈’을 외쳤다

돌아와 불펜에 있는 아홉 개의 헬멧

돌아오지 않는 연, 나무, 향

윤회한 헬멧이 구륜처럼 반짝인다

알로 만월로 차오른다 저들은

공을 두고 선수 치던 선수들의 후예

해를 두고 시를 택해 왼쪽으로 혹은

오리궁둥이로 달에서 태어난 그들

태어났으므로 태어나고 태어날 것이다

눈 아래 공은 없고 공만 있는 구장이

내려놓은 인욕을 명상으로 품고 있다

돌아오지 않는 자의 흔적인가 달빛 품은

베이스의 꼭짓점이 삭발처럼 빛난다

 

 


 

 

강윤순 시인 / 서약

 

 

새로운 수문이 열리는 곳으로

사람들이 강줄기처럼 모여든다

공약의 증표를 이마에 붙이고 비디오는

멈춘 채 온몸으로 흐른다

검은 뿌리가 하얘지려면

미리내 같은 용서가 필요해요

초가 분을 지나 도미노에게 바톤을 넘긴다

윤슬의 머리 위로 쌍무지개가 뜨고

새로 난 길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저 길은 푸른 안개와 허니와 가시덤불이

애드립으로 깔린 극본 같은 것

때에 맞춰 바람은 투명한 씨앗이어야 해요

두 줄기 강물이 하나로 흐를 때

물들여진 현란한 색채는 희석되고

감자는 반으로 나누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자유의 굴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네게 짝이 되어주는 것

서로의 언약에 메니페스토가 되는

입이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어느 멋진 날의 주인공이 되어요

서로에게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요

뜨거운 눈, 싱싱한 설레임이

서로를 향해 걸음걸음 다가간다

길 옆으로 길 사이로 뜨거운 바람이 인다

하나의 그림자 안에 두 개의 하트가 교차된다

 

 


 

 

강윤순 시인 / 열해리

 

 

열렸다

은행 문 위에

은행이 열려있었다

열해리였다

 

깡통계좌가 무더기로 터졌다

조명탄이 막무가내로 터졌다

블랙홀에서 온천수가 솟구쳐 올랐다

열해리였다

 

‘샴페인을 터뜨리자’ 누군가

선창을 불렀다 선창이 바다로 굽이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기대는 허공 속에 걸려있었지만

오리는 오리를 믿지 않았다

가리비가 배를 내밀고 입을 앙다물고 있었다

 

게릴라폭우가 쏟아지는 날

뱀이 돌아앉아 똬리를 풀었다

문에 가득 찬 달이 흘러내렸다

 

녹아내렸다 아버지 그림자에

스물두 번째 해드뱅잉을 하던

 

아들이 녹아서

아들이 되었다

열해리였다

문수 없는 신이 유행되고 있을 때였다

 

-<시인정신> 2014년 가을호

 

 


 

 

강윤순 시인 / 얼굴

 

 

팔색조거나 첼로거나

하마거나 복부인이거나

동그라미를 그리거나

선생님을 추월 할 것

유명세를 생각해 보셨나요

처음부터 텍스관리를

잘 해야 하거든요

부가가치세는 십 퍼센트

약정율입니다

부과세는 눈 덩이가 될 것이니

투명인간이 됩시다 광장을

누비는 저 늑대들의 울음은

가장행렬입니다 앞으로

몇 개의 탈이 더 필요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석공이

다듬고 있는 석고상이

달아오르고 있네요 면목이

길을 잃었나봐요 철판은

두꺼워질수록 투명해 집니다

반반한 바위 속에 떠있는 보름달

정치가의 화장품 CF에

모닥불은 왜 혼자 화끈거릴까요

노랑꽃 핀 중환자실에 왜

시한부 달력이 걸려있을까요

표지는 책의 모델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거울입니다

 

 


 

 

강윤순 시인 / 야래향(夜來香)

 

 

 숲은 아기코끼리의 걸음마를 기억하지 레일 위에선 타잔의 생소리가 굴러가고 잎들의 수다가 가지에서 가지로 옴처럼 번졌어 그림자에서 별이 쏟아졌지 낯선 그림자는 서로의 눈빛에 유리벽을 쌓았고 가시덤불은 암거래를 시작했지 꽃들의 향기가 온 낮을 휘젓고 다녔어 뭉개진 내 그림자는 적막을 둘러치고 몸속에 뿌리를 내렸어 바람은 씨줄 날줄로 무늬만 엮어냈지 해 밑으로 내 혈관 속의 레일을 세 배로 늘리려던 옥타브, 미래는 장단역의 기찻길처럼 끝이 나버렸어

 

 등번호 588, 어둠이 빛을 내는 숫자, 기억하나요 별빛에 퉁겨지는 리멤버, 흰 감자가 온유해요 창틀을 타고 자주빛 감자꽃이 피어올라요 당신 옷섶에 배어 있는 해의 온기가 문란해요 그림자가 냉랭해요 밤이 거위 목털처럼 온순해지고 있네요 어둠이 불러낸 당신은 당신을 따돌리고 있나요 적막 안에서 미래로 키운 야래향이 레일 위로 몰려오고 있어요 우리 오늘 밤 저 향기에 흠뻑 취해보아요 오래된 발자국이 기억 날거에요 밤이 솟구치고 있거든요

 

 


 

 

강윤순 시인 / 이중성

 

 

거울 앞에 피카소 그림 <거울 앞의 여자>가 있다

거울의 그림 속 여자의 왼팔은 왼쪽에 있고

그림 속 거울은 여자의 오른팔을 왼쪽에 두고 있다

그림 속 거울과 여자 사이에는

반대를 위한 반대의 눈들이 깊은 속도로 부화되고 있다

(천장에 있는 빛의 온도는 적당하다)

 

거짓을 모르는 거울의 심장은 거울 뒤편에 있다

거짓을 모르는 심장은 거울 앞에서는

거울을 가로질러 사물을 반대로 내비치고 있다

 

그림 속의 여자는 거울 속에 빠져있다

얼굴의 반쪽은 이성으로 형성되고

거울은 그림 속 <거울 앞의 여자>를 지켜보고 있다

 

얼굴선이 투영화법으로 거울 속에 되비친다

여자의 부분이 오로라로 빛나고

여자의 부분이 예견으로 부풀고

여자의 부분이 거울 보는 사람을 향해있고

여자의부분이 과일로 익어가고

여자의 부분이 곡선으로 거울 속에 굴러다닌다

 

그림 속의 여자가 거울 안에 있어도

여자는 거울 밖의 코로 숨을 쉰다

여자가 거울을 싸안고 있어도

거울 속의 여자는 여자 아닌 여자로 있다

피카소는 그림 안의 거울 속에서

여자를 거울로 되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강윤순 시인 / 악어 백

 

 

 뒤는 돋우어야 해요 그 뿔이 우뚝하거든요 우린 배경 속으로 매일 백을 들고 걸어가죠 멀지 않은 곳에 벤치가 있어 아늑해요 가장자리에선 늘 살꽃냄새가 풍겨요

 

 뒤를 싸주어야 해요 이빨이 날카롭다고 나무라지 말아요 뒤는 이어져야 하고 때맞춰 말을 꽂아야 하거든요 빈랑나무 숲이 우거질 때 쯤 뒤는 환해 질거라 믿어요

 

 뒤돌아서 삼키던 눈물을 기억 하나요 살가죽을 벗겨내고서야 흰 피를 보고서야 백의 무게를 가늠했던 당신 아열대 안에 생긴 빙산이 언제까지 녹지 않았었지요

 

 뒤는 이제 더 이상 어둡지 않을거에요 백이 백을 세다가 백열등을 생각해냈거든요 관리인 백이 후진 차에 걸려있어요 악어 백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어요

 

 


 

강윤순 시인 (1949~2019)

2002년 《시현실》을 통해 등단. 시집 『108가지의 뷔페식 사랑』 『선연이 선연하다』. 2017년 <시와 세계> 작품상 수상. 2019년 9월 18일 지병으로 별세(향년 7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