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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맹문재 시인 / 용서에 대하여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5.
맹문재 시인 / 용서에 대하여

맹문재 시인 / 용서에 대하여

-정신대 할머니들의 그림 앞에서

 

 

용서는 보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아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초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성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치료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화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긍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미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승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대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위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동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약속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희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전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맹문재 시인 / 가장자리에서

 

 

가장자리에서 나는 새벽 돛을 올린다

 

가장자리에서 이불을 개고 머리를 감고 면도를 한다

가장자리에서 아침식사를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한다

가장자리에서 달려오는 차들을 피해 횡단보도를 건너고 출근버스에 오른다

가장자리에서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주방의 가스밸브가 잠겼는지 걱정한다

가장자리에서 대출이자를 걱정하고 시계 약을 넣는다

가장자리에서 구두를수선하고 인터넷 골목을 뒤지며 출구를 찾는다

가장자리에서 튼 손에 크림을 바르고 흰머리를 뽑는다

가장자리에서 술을 마시며 막차를 걱정하고 이삿짐센터를 부른다

가장자리에서 전태일 평전을 떠올리고 계약직 신분증을 찢는다

가장자리에서 라면을 끓이고 실직자의 자살 소문을 듣는다

가장자리에서 라면을 먹는 초등학생 딸을 고마워하고 학교 준비물을 챙기는

딸을 고마워하고 중간고사를 치르는 딸을 고마워한다

 

가장자리는 나의 침실이다

가장자리는 감기 든 나를 일으켜주는 얼큰한 콩나물국이다

가장자리는 나의 계좌이다

가장자리는 나를 착한 욕심쟁이로 만드는 앨범이다

가장자리는 나의 신발장이다

가장자리는 나의 길을 넓혀주는 줄자이고 곡괭이이다

가장자리는 나의 돛단배이다

 

가장자리에서 나는 새벽 돛을 올린다

 

 


 

 

맹문재 시인 / 피곤한 발을 언제쯤 풀어줄 수 있을까

 

 

1

오늘도 무사했구나,

현관문 앞에 서서 귀가를 기다리고 있는 발을 내려다본다

 

자정 넘도록 집 안에 들지 못한 채 길 위를 걷고 있는 발

비 맞은 강아지처럼 측은하다

 

나는 발의 피곤한 표정이 정치 뉴스를 듣는 데 지쳐서라는 것을

공사장의 소음에 시달려서라는 것을

곡괭이질에 부쳐서라는 것을 잘 안다

 

더 큰 이유가 있다는 것도 잘 안다

 

2

나는 오늘 천 일 넘게 한데서 떨고 있는 기륭전자에 가지 못했다

무척 가고 싶었지만

논문 마감일에 쫓기느라 포기하고 말았다

 

사실 그곳에 가는 길은 만만하지 않다

버스 노선이며 골목길도 찾아야 하지만

생업을 잃을 위험도 감수해야 된다

 

가야 할 곳에 가지 못해

나의 발은 하루 종일 바빴다

 

3

피곤한 발을 언제쯤 풀어줄 수 있을까?

 

 


 

 

맹문재 시인 / 사북

 

 

일찍이 찾아가 자본 적이 있기에

잔돈 세듯 눈에 선한 곳

 

지형을 정확하게 모르게

인구수를 알 수 없어도

 

광부 아버지의 장화 발자국이 깊어

해석이 필요하지 않는 곳

 

 


 

 

맹문재 시인 / 책을 읽는다고 말하지 않겠다

 

 

책(冊)이란 한자를 찾다 보니

부수로 경(门)이 쓰이는 것을 알았다

옛날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을 읍(邑)이라 했고

읍의 바깥 지역을 교(郊)라 했고

교의 바깥 지역을 야(野)라 했고

야의 바깥 지역을 림(林)이라 했고

림의 바깥 지역을 경(门)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책을 둘러싸고 있는 경계선은

내 시야가 닿기 어려운 거리이다.

나는 책을 읽어서는 세상을 볼 수 없다고 믿어왔는데

책의 경계선 안에

산도 강도 들도 짐승도

사람도 시장도 지천인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칸트는 평생 동안 백 리 밖을 나가지 않고

서재에서 보냈다고 한다

결혼도 하지 않고

시계와 같이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벌써 백 리 밖을 벗어났고

들쑥날쑥 살아가고 있으므로

나는 책을 읽었다고 말하면 안 되겠다

책을 읽는다고 말하지 않겠다

다만 책이 넓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보이는 데까지만 걸어가야겠다

 

 


 

 

맹문재 시인 / 표정두

 

 

신흥금속 판금부에서 일해도

네 식구 살기 어려웠는가?

 

대출 이자보다 무서운 월세가

정치인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는가?

 

벽제 화장장 1번 화구 앞에서

그대의 어머니가 주저앉았네

 

신나 두통을 가방에 넣고

서울 세종문화회관까지 올라온

전라도 송정 사람아

 

나를 불러일으키는 동갑내기야

 

 


 

 

맹문재 시인 /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추석날 고모님댁에 인사를 가는데

버스정류장 한쪽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호기심으로 다가가니

개 한 마리 건물 구석에 놓여 있었다

에구, 누구집 개야, 안됐네

한마디씩 남기고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

마지막으로 내가 남았다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가축 병원이 어디 있나 둘러보았지만

보이지 않았고

주인이 나타나기를 한참 기다렸지만

역시 헛일이었다 차에 치인 개는 피를 계속 흘리며

그저 숨만 볼록볼록 쉬고 있었다

나는 개를 살리고 싶었지만

싣고 갈 차도 필요한 돈도

할애할 시간도 없어

끝내 개를 남겨 놓고 돌아서고 말았다

누가 개를 발견하여

얼른 가축 병원으로 옮겨 주었으면, 몇번이나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도망을 가고 있음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맹문재 시인

1964년 충북 단양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와 同 대학원에서 수학(국문학 박사). 1991년 《문학정신》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책이 무거운 이유』 『사과를 내밀다』 등.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中. 1996년 제6회 윤상원 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