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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홍 시인 / 길을 잃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4.
박홍 시인 / 길을 잃다

박홍 시인 / 길을 잃다

 

 

 삼양동 산동네에서 길을 잃었다 골방에 숨어서 겁먹은 짐승처럼 수음을 하다가 부아가 치밀어 빨래골로 해서 칼바위 그 시퍼런 칼끝을 타고 북한산을 오르내리다가 길을 잃었다 숨바꼭질하듯 달아나는 내 무의식을 쫓아가다가 길을 잃었다 길은 내 머릿속에 잡초만 키웠다

 

 벽에도 천정에도 달팽이 자국처럼 분비물처럼 번쩍였다

 

 길을 잃고 붙잡혀가는 젊은이들이 전파를 타고 전달되었다 나는 내가 무서워서 자꾸 골방으로 숨어들었다 골방에는 모르는 짐승들이 우글거렸다

 

 짐승들이 구걸하고 다니는 짐승들이 상처 입은 짐승들이 우물 안 개구리로 사는 짐승들이 도망 다니는 짐승들이 짐승인 줄 모르고 짐승처럼 사는 짐승들이 나와 더불어 사는 짐승들이 모두 용서를 받으면 나는 없어졌다 나는 둥둥 떠다니는 바람이었다

 

 어느 날 짐승 한 마리가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나는 고향을 찾아가는 탕아처럼 아늑하게 병원에 감금되었다 잘못도 없이 용서를 받은 듯 낄낄거렸다

 

 칼바위 그 시퍼런 칼끝을 타고 다니던

 내 스무 살은 한 마리 짐승이었다

 

 


 

 

박홍 시인 / 월미도에서

 

 

비린 바닷길 따라

탁주 냄새가 마중을 나왔다

햇볕도 없고 그림자도 없고

아침인지 저녁인지 구분이 안 되는 시간

문을 열자 이난영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목을 끌어안는다

움찔 놀라 감긴 팔을 푸는데

섬처럼 떨어져 있는 몇 개의 원탁엔 영감탱이 둘뿐이다

노트북 반쪽만큼이나 커다란 스마트폰이 노래를 풀어놓고 있다

형님 나 술 많이 먹었어요,네 병!

귀에 오래된 탁주 냄새가 얼큰하다

이건 우리 아버지가 좋아하던 노래예요

아줌마 여기 한 병만 더 주세요

바다가 출렁거리고 있다

바다에 술을 붓는다

우리 형님 왔으니까 한 병만 더 주세요

젊은 연인들이 들어오고 바다가 사납게 출렁거린다

형님 나 노래 하나 부를께요

멀리 머구리배가 지나가는 게 보인다

또 다시 말해줘요 사랑하고 있다고〜

붉은 동백꽃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모두들 조용히 떨어지는 동백을 보고 있다

조용하세요,떨어진 동백을 주섬주섬 챙기면서 주모가

분위기를 흔들어 놓았다

바다가 잔잔해진다

그가 다시 바다에 술을 붓는다

 

 


 

 

박홍 시인 / 염치廉恥에 대하여

 

 

 옥상 화단에 심은 拘杞子 열매가 발갛게 익었다

 차를 끓여 먹으려고 따는데 참새들이 멀찍이 처마 끝에 몰려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내가 방으로 들어오자 우르르 날아와서 미처 따지 못한拘杞子와 손이 닿지 않은 곳의拘杞子까지 따먹는다 커서 통째 삼키지 못한 것들은 물만 쭉 빨아먹고 쭉정이만 남겨 놓았다

 

 염치가 보여서

 다음날부터 참새가 있을 땐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박홍 시인 / 風葬치는 벌판

 

 

 벌판에 풀 마르는 냄새가 자욱하다 매운 연기 같다 버썩거리면서 콧속을 파고드는 마른 풀냄새로 몸뚱이 부푸는 듯, 붙을 불이면 확 타오를 것처럼 질식할 것처럼 숨이 가쁘다 어질어질하다 독한 風葬의 냄새다 눈길 가는 곳마다 바람에 체위를 바꾸면서 풀이 초록들을 風葬치고 있다 탁, 탁 씨앗들이 퉁겨나간다 여름내 무성했던 초록을 되돌려주고 있는 것이다 물과 햇빛과 바람으로 빚었던 초록의 한 살이를 끝내고 다시 물과 햇빛과 바람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儀式이다 바싹바싹 形骸로 돌아가는 가을 벌판의 行事다 나도 風葬치고 있다

 

 


 

 

박홍 시인 / 내 언어들은 계절을 성큼성큼 건너가고

 

 

 그림이 좋은 달력을 벽에 걸었다

 창이 뚫렸다

 

 거기, 보랏빛 지층을 뚫고 해가 첫닭 울음처럼 터진다

 능선이 벌겋게 진달래가 건조하다

 아, 나무들이 서로의 초록을 훔치고 있다 투명 수채화가 칙칙하게 변해간다 바람은 어디다가 비와 구름을 쟁여 놓았나 천둥 번개가 초록을 마구 헝클어 놓았다

 땡볕이 고요를 환하게 펼쳐 놓는다

 텅 빈 골목을 타고 혼자 떠도는 라디오의 유행가 소리

 어디서 매미들은 쇠를 자르고 있다

 

 미루나무가 새떼처럼 파닥인다

 

 은행잎이 덜컹 내려앉는다

 

 살얼음이 물을 스쳐 가고 함박눈이 펑 펑 수직으로 내린다 눈 뭉치가 떨어지는 소리,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지는 소리, 설해의 풍경에 잠시 갇힌다

 

 휘몰려가는 언어들을 놓치고 내가 아득하다

 

 


 

 

박홍 시인 / 한파주의보

 

 

 오랫동안 동네에는 노인들만 남았다 겨울이면 초저녁부터 칠흑이다 적막강산이다

 

 풀쩍 풀쩍 건널 수도 있을 것 같은 고만고만한 슬래브집들 옥상에 달빛이 하얗다 옥상 밖으로 발이 빠진 달빛들은 전봇대며, 쓰레기통이며 골목의 구석구석까지 염탐하고 다닌다 줄을 그은 듯 까만 담벼락 그림자를 따라 보도블록이 거울처럼 눈부시다

 

 하늘이 한파로 가득하다 검푸른 우주의 무시무시한 어둠이 몰려왔나 별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다 별빛이 별에 고드름으로 매달려 있다 달빛은 누런 삼베 폭포를 만들어 붙였다

 

 수도관이 터졌는가 항아리가 얼어 깨졌는가 이웃집 개가 자지러지게 짖는다 손주를 잠재우던 노인이 밖이 궁금하여 문을 열고 나왔다 손잡이에 손바닥이 쩌억 달라붙었다 노인은 진저리를 치면서 마당을 둘러보고 잠시 산짐승들을 떠올리다가 방으로 들어간다

 

 


 

 

박홍 시인 / 내 언어들은 계절을 성큼성큼 건너가고

 

 

 그림이 좋은 달력을 벽에 걸었다

 창이 뚫렸다

 

 거기, 보랏빛 지층을 뚫고 해가 첫닭 울음처럼 터진다

 능선이 벌겋게 진달래가 건조하다

 아, 나무들이 서로의 초록을 훔치고 있다 투명 수채화가 칙칙하게 변해간다 바람은 어디다가 비와 구름을 쟁여 놓았나 천둥 번개가 초록을 마구 헝클어 놓았다

 땡볕이 고요를 환하게 펼쳐 놓는다

 텅 빈 골목을 타고 혼자 떠도는 라디오의 유행가 소리

 어디서 매미들은 쇠를 자르고 있다

 

 미루나무가 새떼처럼 파닥인다

 

 은행잎이 덜컹 내려앉는다

 

 살얼음이 물을 스쳐 가고 함박눈이 펑 펑 수직으로 내린다 눈 뭉치가 떨어지는 소리,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지는 소리, 설해의 풍경에 잠시 갇힌다

 

 휘몰려가는 언어들을 놓치고 내가 아득하다

 

 


 

박홍 시인

부산 출생. 본명: 박홍식. 경희대 화학과 중퇴. 2010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 『나의 옥상 와이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