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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윤향기 시인 / 사랑의 퍼소나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5.
윤향기 시인 / 사랑의 퍼소나

윤향기 시인 / 사랑의 퍼소나

 

 

이과수폭포에 사는 검정칼새는

노랑구두를 신고 무지개다리를 툭 차며

눈부신 하늘로 솟아오른다

 

이과수폭포 속으로 검정칼새들이 뛰어든다

굽이굽이 접은 날개를 칼날처럼 푸르게 벼려

쏟아지는 비명 속으로 거침없이 자신을 던진다

 

내가 그대에게 사랑한다고 했던

말도 저와 같았다

 

 


 

 

윤향기 시인 / 둥근 절벽

 

 

 모깃불을 피워놓은 안마당 두레상에 간 고등어 한손을 달빛 묻혀 노릇노릇 구워놓고 허리 굽은 노모가 내 밥을 차려주신다

 제비새끼에게 밀고 달고 먹이를 넣듯 남김없이 주던 사랑 밥에서 피어오르던 김 같은 말씀들이 여생을 세마치*로 접어 감추며 휘휘 애 터지게 말라간다

 

 


 

 

윤향기 시인 / 한 번쯤은 나를 잊기도 하면서

 

 

한 번쯤은

하늘의 별을 헤며 걷다가

그리운 이의 이름을 부르며 걷다가

숲 속에 빠져 길을 잃고 싶다.

불러도

불러도

사람의 목청이 닿지 않는 먼 곳

섬에 갇히어

누군가를 소원처럼 기다리고 싶다.

내 이름도 잊어버리고

웃음도 낯설어지면

쏴 밀려오는 파도에

깎이는 가슴

앙상하게 남은 마음만 들고

노을 든 벼랑에 서 있고 싶다

 

 


 

 

윤향기 시인 / 몸!

 

 

태어날 때 입고 온 옷

떠날 때 입고 가는 옷

순례자의 첫 옷이자 마지막 옷

 

신성한 강물이 흘러가네

해와 달이 출렁이네

이처럼 행복한 사원 어디 있는가

 

 


 

 

윤향기 시인 / 어느새 가을이 깊어졌습니다

 

 

어느새 가을이 깊어졌습니다.

무성한 사랑으로 흔들리며 타오르던

여름이 지나고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제치는

가을이 왔습니다.

그리운 가슴을 그리운 가슴이 물들이는

가을이 왔습니다.

사랑을 말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계절입니다.

쏟아지는 사랑의 소나기에 온 몸을 적시던 여인이

혼신의 사랑이 지나간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며 숨죽여 울고 있습니다.

 

 


 

 

윤향기 시인 / 쓸쓸한 채집

 

 

나비를 수집하러

팔라우, 페낭, 마다가스카르에 온 적 있다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한 열대로 치장한 나비들이

비린내가 날 때가 있듯이, 모든 나비들이

번개의 엽록소를 탁본하지는 않는다

날개 달린 뱀들이 떼 지어 지나는 곳에서

곧잘 목이 메는 황금색을 채록하는 것은

누군가 흘리고 갔을 눈물 하나 줍는 일이다

누군가 흘리고 갔을 이름 하나 줍는 일이다

 

그리하여

나비가 꽃잎을 박차고 장자의 산맥을 넘어갈 때

날개를 먹이와 바꾼 어떤 떨림은

살아서는 발굴되지 못할 이름 모를 계곡에 뒤태를 묻고

가슴을 문질러 젓대를 불던 어떤 춤사위는

살아서는 발굴되지 못할 늪지에 앞태를 묻는다

 

천 년 전

별이 쓸린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아

이 세상에 와서도 바오밥나무 몇 잎은 가늘게 흐느꼈다

 

-시집 <순록 썰매를 탄 북극 여행자>에서

 

 


 

 

윤향기 시인 / 사랑을 떠나보내는 칼새

 

아구아수 폭포에 사는 검정 칼새는

노랑 구두를 신고 무지개 다리를 툭 차며

눈부신 하늘로 솟아오른다

이구아수폭포 속으로 검정 칼새들이 뛰어든다

굽이굽이 접은 날개를 칼날처럼 푸르게 벼려

쏟아지는 비명 속으로 거침없이 자신을 던진다

내가 그대에게 사랑한다고 했던

말도 저와 같았다

 

-시집 『순록썰매를 탄 북극 여행지』에서

 

 


 

윤향기(尹香基) 시인

1953년 충남 예산 출생. 경기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 1991년 《문학예술》로 등단. 경기대학교 한국동양어문학부 교수, 시인, 여행작가. 시집 『북극 여행자』 『피어라, 플라멩고!』 『흙, 바람을 채집하다』 『엄나무 명상법』 『굴참나무 숲과 딱따구리』 『내 영혼 속에 네가 지은 집』 『그리움을 끌고 가는 수레』. 수필집 『태도가 뮤지컬이 될 때』 『아모르파티』 『나는 타인이다』 등. 2006년 제4회 서정시학상 수상,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원, 『열린시학』 고문, 『문학에스프리』 편집인. 웹진 『시인광장』 객원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