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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만 시인 / 내가 좋아하는 과일
따뜻함도 과일처럼 열릴 때가 있다 따뜻하다를 따면 몇 개의 계절이 주렁주렁 키를 늘린 나무로 열린다 따뜻하다를 한입 먹으면 남도의 저녁이 목젖에서 울음을 터트린다 그 울음에 매달려 있는 노을을 따서 등뒤로 감추면 밤이다 밤에도 따뜻함은 밝아서 불인 양 쬐다보면 몸속이 동그랗게 부푼다 목소리가 환하다면 따뜻하다를 따먹었다는 것 먹다가 손 비벼보면 파란 귀가 푸드득 몇 개의 밤을 날아다닌다 봄볕에 헹군 나무에 손을 걸어놓으면 달이 둥글게 익어가는 시간 따뜻함도 과일처럼 열릴 때가 있다
권기만 시인 / 동거
얼굴이 간지럽다 다섯 마리 토끼가 풀을 뜯는 모양이다 아무도 본 적 없지만 내 얼굴에는 다섯 마리 토끼가 산다 내가 미소를 지으면 깡충 깡깡충 뛰어다닌다 내가 우울하면 쫄쫄쫄 굶는다
다섯 마리 토끼가 뛰어다니는 얼굴을 보는 건 즐겁다 토끼가 뛰어다니고 있다면 틀림없이 맛있는 대화 중이거나 사랑하고 있을 때다 소곤소곤은 토끼가 제일 좋아하는 풀이다
한겨울에는 토끼도 어쩔 수 없이 말 속에 굴을 파고 들어가 잠을 잔다 봄이 오고 사방에서 꽃이 터지면 기다렸다는 듯 소풍을 간다 꽃 한 송이마다 한아름의 미소가 사는 걸 알아보는 건 토끼다 입 다물고 있어도 봄이 지나고 나면 살금살금 미소가 살쪄 있다
소곤소곤 조곤조곤을 뜯다가 어른 토끼들은 구름 속으로 이사를 간다 큰소리는 토끼가 제일 싫어하는 풀이다 아이들 말은 토끼의 발 버짐 핀 듯 얼굴 왼쪽이 간지럽다 다섯 마리 새끼 토끼가 풀을 뜯는 모양이다
권기만 시인 / 어머니가 사는 곳
옷이 엄니 손같이 느껴지는 날 나는 아이처럼 엄니가 벗겨주던 대로 옷을 벗는다 물끄러미 앞섶 바라보던 콧날 참 따뜻하다 내 안의 것을 보는 듯 한 눈빛 한 종지 미소 같은 단추를 끄른다 눈물 가득 고인 조그만 호수 주름진 엄니 손마디 물결처럼 일렁인다 얼룩진 윗도리 벗어 빨래통에 던진다 던지면서 돌아앉는 뒷모습에 얼른 다시 줍는다 엉거주춤 벌린 두 팔 엄니가 안아 달랬을 세월 안겨있다 단단히 여며주지 못해 힘들어하던 모습 후줄그레 어려 있다 벗어든 옷으로 엄니 잠시 나를 보듬는다 부시시 까슬하다 주름진 옷 속 조그만 엄니 빨래통에 넣으려다말고 부둥켜안고 한참 참는다
권기만 시인 / 이팝
입맛이 까칠했던 게지 저렇게 한꺼번에 침 뱉어 놓은 걸 보면 몸속에 게 한 마리 키운 게지 뒷걸음치다 주저앉을 수 없어 혀 깨물고 있었던 게지 바람이 일 때마다 허옇게 부서지는 젖살 정말 먹이고 싶었던 게지 보낼 수 없는 것을 보내 살이 아프다 안으로 곪아 터지면 입안에 거품이 이는 걸 죽어도 몰랐던 게지 아버지 돌아오지 않는 탄광촌 언덕 쌀이 익어 이밥처럼 쌀이 익어 허옇게 흐드러진 게지 먹일 수 없어 입으로 끓어오른 햇살 퉤퉤 뒤집어쓰고 허허 곡하는 게지
권기만 시인 / 지구에 사는 우주인 6
간질간질한 바람에 속아 꽃이 되어본 적 있으신지
쑥부쟁이로 무당 사슴벌레로 바퀴 달린 벌과 붕붕 공기를 뿜다 박쥐의 저녁으로 날아다녀본 적 있으신지
바람의 언덕에서 반쯤 지워져본 적 있으신지
밤의 종점에서 나이를 먹지 않는 마젤란 여자들과 만년처럼 하룻밤 꼴딱 새워본 적 있으신지
발목에 흰털빛 두른 바슘처녀들과 꿈결 풀어 물병자리에 앉아본 적 있으신지
뭇별 한 동이 사서 돌아오는 새벽 백 년은 늙지 않는다는 그 물 한 그릇 단숨에 마셔본 적 있으신지
뱀자리 지나 도착한 은하의 휴양지 반짝임만 모아놓은 光年의 푸름에 취해본 적 있으신지
눈 감고 천천히 지나가는 구름의 문체
냇물이 발가락을 건드릴 때 발그레 얼굴이 둥글어지는 간질간질한 지구인을 살아본 적 있으신지
권기만 시인 / 탑
돌은 몇 개만 쌓아도 탑이다 가지 위에 가지 올린 나무도 탑이다 한 발 위에 한 발 올려 산에 오르면 탑이 되는 사람들 몸 위에 몸 하나만 올려도 삼층탑이다 구름 위에 달을 올렸다 해를 올렸다 수금지화목토천해 누가 쌓은 탑일까 꽃잎 위에 꽃잎 올려 탑 쌓기 놀이에 분주한 애기똥풀 형제 나뭇잎 몇 장 띄워 탑 쌓고 골짝을 돌아 탑돌이 나선 냇물 서로를 무등 태운 몸 낮춘 샛강 일파만파가, 모두 기단석이다
권기만 시인 / 귀신고래울음 한 접시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은 변광성 군락지다 빅뱅의 DNA가 보존되어 있다는 처녀자리 은하단 삼엽충 지대를 지나 국부은하군 우리 은하 오리온 팔 국부 성간구름을 지나자 은하외곽 태양계가 어둠을 닦고 있다 국부은하군 최고의 리조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101번 직바 구리 게이트로 나서자 귀신거래울음 한 접시 가게가 보인다 해파랑목울대를 목에 걸자 6천 개 지구언어가 소통에 진입한다 무인택시에 타면 입국절차는 자동 처리, 해운대 파라다이스 98층 스카이 룸에서 바라본 대마도는 두 개의 젖가슴 같다 미리 주문한 30만 광캐럿 정우성X-100 모델이 배달되어 있다 영혼 이동 한 시간 동안 적응 프로그램까지 마무리되자 움직이는데 별다른 불편이 없다 벗어놓은 쌍둥이 아미달라 행성의 잠든 몸이 무거워 보인다 팔을 2개로 줄여놓으니 가려운 등은 어찌해볼 수 없다 책 읽어주는 아가씨로 지구를 선택해 놓고 상상의 푸름에 올라본다 저녁은 빠르게 지나가고 지구의 아침은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온다 온몸으로 받아 안기엔 너무도 벅차다 순도 높은 태양의 광전자로 에너지를 충전하자 암흑물질처럼 떠돌던 허기와 추위가 씻은 듯 사라진다 세포 하나하나가 눈부시게 반짝인다 스프와 샐러드, 갓구운 빵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발바닥이 노출된 신발을 신는다 은하의 별을 수집해놓은 백사장을 걸어보는 건 꼭 해봐야 한다 발밑을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유성의 감촉, 신의 입술은 이토록 감미롭다 듣지않고 다만 느끼려 여기에 왔다 살갗을 질주하는 무한대의 파도가 귀를 적신다 젖어서 멍하니 꿈이다 신발을 벗고 발목까지 모래 속에 넣어본다 2천여 개의 별을 지나온 고달픔이 금빛모래처럼 환해진다 행성여행일지에 자동 기록된 국부거품의 동향을 지우고 모래, 불후의 음악이라 적는다 젊은 남녀의 키스하는 입술 위로 공간축약 스노보드를 타고 백록에 올랐다 같이 온 일행의 행동기록이 빠르게 지나간다 바퀴 없는 차들이 마젤란은하 대사 일행을 태우고 오륙도 해저3만리선착장으로 소리 없이 미끄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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