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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환 시인 / 시인의 나라
독립해방을 노래하다 죽임당한 시인 일왕 찬양 징용 독려를 노래해도 교과서에 나온 시인 민족통일을 노래하다 빨갱이가 된 시인 독재자 구호 따라 음역 이탈 자행한 시인 주는 상 받았다고 생욕 먹는 시인 시보다 강연을 더 잘하는 시인 인기 시인에서 추행범으로 몰린 시인 아무 말 조합으로 미로迷路를 생산하는 시인 등단 수십 년에도 숫기 없으면 발표도 못하는 시인 제 돈 들여 등단한 시인 아주머니 아저씨 할아버지 할머니 너도나도 시인 등단 삼십 년에도 원고료는 오만 원짜리 시인 그래도 꾸역꾸역 시를 쓰는 시인 오뉴월에도 서리를 피우는 시인 엄동에도 벚꽃을 피우는 시인 시인 만재滿載 사우스 코리아 시인의 나라 대한민국 만세
김윤환 시인 / 무우
차라리 해가 없었더라면 나도 하늘을 보았으리라 내 머리 위로 푸르른 청춘이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내 뿌리도 흙 대신 바람을 입었으리라
캄캄한 아침이 오면 별들의 소식이며 나비들의 기침소리며 내가 볼 수 없었던 내 머리 위 꽃등이며 수맥으로 전해져 오는 세상의 소식 소식들
갇힌 채 여물어가는 뽀얀 속살 수행조차 부끄러운 캄캄한 지옥에서 근심 없는 미래를 보네
차라리 내가 꽃이었으면 차라리 내가 빛에 타들어가는 외눈박이였으면 바람 숭숭 들어간 하얀 무우(無憂) 지옥에서 천국을 복사(複寫)하는 근심 없는 백치(白痴)였으면 차라리,
김윤환 시인 / 검은 외투를 입은 나방처럼
노을을 슬퍼하는 진짜 이유는 잔광(殘光)이 마치 동굴을 향해 들어가는 어린아이의 지워지는 눈동자처럼 보였기 때문이야
맑고 푸른 아침을 내 것처럼 으스대지 말걸 그랬어 오후가 가까울수록 쓸쓸한 시간 꽃은 지고 향기도 말라 아무 것도 건져 올 수 없는 이승의 벌판
꽃술에 취해 반복되는 노을이 마침내 동굴에 자리를 편다 산 채로 불붙어가는 흰 나방의 꿈
하늘의 별이 아니라 어둠의 별이 되고 싶었지 동굴의 눈(眼)이 되고 싶었지 마치 검은 외투를 입은 나방처럼
김윤환 시인 / 점걸이
그의 아명은 점이었다 어린 시절 종아리에 있었던 커다란 점에 어른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원래의 이름을 두고 점걸아 부르면 몹시 싫어했지만 대답은 놓치지 않았다 점을 따라 불러진 이름, 그 점을 받아들이며 대답했던 소년 점걸이는 점과 함께 사라졌지만 그를 기억하는 모든 이에게 점은 그를 기억하는 한 지점이 되었다
목청껏 부르짖는 말들에 방점을 찍고 죽을 만큼 힘들게 모은 것들에 방점을 찍고 무언가를 마칠 때 또 하나의 점을 찍으며 살아왔지만 점점 많아진 점과 흐려져 가는 점 우리는 점을 알이라고 했고 말없음의 부호라고도 불렀다
시간의 정점을 지나 여백이 끝나는 어느 지점에 닿으면 점이 제 몸은 아니었음을 알게 되지 삼월에 내리는 눈발이 투명한 점을 찍으며 시간 밖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게 하지
김윤환 시인 / 공책의 전설
초등학교시절 새학기가 되면 누나는 늘 새공책을 사주곤 했다 열심히 공부하라고 그러나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나의 공책은 온통 어설픈 만화로 채워 있었고 객지로 나갔던 누나가 돌아오는 학기말이면 으레 미안하곤 했다 누나는 다시 공책을 사주며 새롭게 시작하라고 웃어주었지만 나의 공책은 여전히 빈칸을 두지 않고 온갖 그림과 낙서로 분칠되어 있었다 그렇게 농고를 졸업하기 까지 공책은 뭔가로 채워졌지만 글자는 몇 자되지 않았다 공책은 공부하는 책일텐데 나의 공책에는 공부보다 공상들로 채워졌었지 나는 스무살이 된 후 공책을 쓰지 않기로 했다 사십년이 지나 모든 공책은 분서되었지만 타다 남은 공책의 재들이 뇌속에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공책에 채워졌던 그림과 낙서들이 가슴에 타닥타닥 붙어 상형문자를 이루고 있음을 보았다 지금도 버렸다고 생각했던 공책들이 유령처럼 내 앞에 어른거린다 오늘도 환청처럼 내게 말을 걸어온다
김윤환 시인 / 칼집
해질녘 칼을 빌어다가 시를 다듬는데 한마디씩 다듬을 때마다 손마디가 날아가고 한마디씩 다듬을 때마다 발목이 날아갔다 마침내 모가지도 없는 허공이 몸통을 이루고 다듬다 남은 바람만이 칼집을 맴돌고 있었다 칼과 칼집은 소리로만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시는 칼집을 빠져나와 알몸의 바람으로 훨훨 사라져 갔다 칼의 집만 남긴 채 빈집에 혈흔만 남긴 채
김윤환 시인 / 그리운 봉자씨
1951년 봄 전쟁 통에 태어난 봉자씨, 열일곱 살 마장동 식모살이 1년 동안 촌스러워 손도 타지 않았다는 주인 말에 그냥 웃었다는 그녀가 식모에서 공장으로 공장에서 식당으로 식당에서 고아출신 남자에게서 아들을 낳고 그 남편이 죽고 그녀가 홀로 세상을 떠도는 동안 우리는 봉자씨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들만이 정반대 방향에서 가난한 제 어미의 뒤를 추적하고 있었다 아들이 아들을 낳는 동안 지병과 만병만 키워 왔다 평생 외롭다는 말 대신 돈이 없다고 말하는 봉자씨가 순천에 내려가 영구임대아파트가 당첨되었다고 이제 정말 딱 혼자 살기 좋게 되었다고 더 이상 자기를 아는 체 말라고 전화를 걸고는 심장에 화가 차서 막걸리로 식힌다는 그녀의 수화기에서 갑자기 엄마가 그립다고 말했다 엄마를 떠난지 60년이 지나 돈 대신 엄마가 그립다는 봉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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