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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덕수 시인 / 전생설화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4.
문덕수 시인 / 전생설화

문덕수 시인 / 전생설화

 

 

그땐 나는 강아지였지.

목화(木花)송이 같은 한 마리 복술강아지였지.

그땐 당신은 목련(木蓮)꽃이었지.

그땐 구름도 당신을 닮아 목련꽃으로 피고

맑은 냇물도 목련꽃 빛으로 흐르고

죽은 바윗돌에선 목련꽃의 싹이 트고

나는 목련꽃 빛의 복술강아지였지.

그땐 나는 온몸이 달아

쇳덩이도 녹일 듯이 온몸이 달아

꽃나무를 위성(衛星)처럼 한 천 번쯤 돌다가

미친 듯이 문득 날아오를 듯

솟구치곤 하다가 떨어져 떨어져

꽃나무를 안은 채 타서 죽었지.

목련꽃같이 핀 이승의 당신

먼 전생의 전생 때부터

나는 당신을 찾아 헤맨 짐승이었지.

 

 


 

 

문덕수 시인 / 안개

 

 

안개들이 道路 위로 기어 올라아서는 눕는다.

안개들이 개천 바닥에서 엎치락뒤치락 논다.

안개들이 工場 굴뚝을 안고 오른다.

안개들이 車를 계속 몰고 온다.

안개들이 아침햇빛을 온통 먹어 버린다.

안개들이 산 위에서부터 서서히 내려온다.

사람이나 꽃이나 짐승이나 실은 모두 안개다.

 

 


 

 

문덕수 시인 / 안라국의 목걸이

 

 

안라국의 궁터 가야 도항리 33호 고분에서

2천년이나 잠자던 목걸이가 지렁이처럼 눈드고 나왔다

불그레한 마노는 왕후의 목덜미빛이요

토기 굽다리에 뜨거운 무늬를 뚫은 불꽃이다

파란 유리구슬은 안라국 어린 공주님 눈빛이요

왕궁 지붕마루에 내려와 앉은 하늘이요

여덟 나라의 침공을 물리친 장수말이 마신 물이다

저 자잘한 비취빛 수정알의 바늘귀에는

지금도 후기 가야 여러 나라 맹주의 숨길이 흐른다

아라가야 궁터 도항리 33호 고분에서

2천년이나 꿈구닥 눈을 뜬 저 목걸이는

지리산 숲속에서 구불구불 흘러 내려 안라땅을 적시는 남강이요

한티 재를 넘어 마산 남쪽 바다로 통하는 바람길이요

여항산 멧부리 남동으로 길게 뻗은 능선이다

아라가야를 지금도 두르고 있는 무성한 성벽이다

 

 


 

 

문덕수 시인 / 종이컵

 

 

인조수지나무에 종이컵이

난쟁이의 고깔처럼 조랑조랑

과일들 맺어 풍성히 영글면 다 따서 담아 주스라도 빚을 듯이

종이컵 하나 따서 길바닥에 던져

구둣발로 꾹 밟고 눌러본다

빈 알루미늄 깡통처럼 쭈그러지면서 한마디 꽥소리 없다

이리저리 굴리고 뭉쳐 손아귀로 꼭 쥐어 본다

오렌지 커피 녹차 혹은 그런 갈증과/ 아예 관련이 없다

이 빈 기도 속에

지구 만한 풍선꿈이 들어앉는다

 

 


 

 

문덕수 시인 / 프로이트 선생에게

 

 

아내에게 대구탕보다 천원이 더 싼

오징어 뽂음을 주문한다

마을의 쌈지공원

온몸 돌리기 파도타기 줄 당기기 하늘걷기...그때

벤취에 편안히 앉은 두 할머니들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가만히 있으면 물고 가"

그 앞을 지나면서 나는 허리를 굽히면서 "무슨 말씀이세요?"

"이 사람은 호랑이 띠야. 양띠인 나와 함께 치악산에 가서

나란이 바위에 앉았는데, 호랑이가 무서워 못 오는 거야. 임자는 무슨 띠야?"

"제 아내는 용띠예요"

"용은 호랑이 보다 두 살아래지"

그때 해일이 밀려와 휘어감고 흔드는 우리 집

기둥의 바닷물 소리가 들린다.

 

 


 

 

문덕수 시인 / 지하철 안에서

 

 

 시속 80킬로의 지하철 선반에 알록달록 배낭 네 개가 눕고 기대고 포개져 떨어지지 않다 뭔가 오순도순 속소리로 속삭이다 선반 밑에는 서른을 갓 넘은 아빠 엄마 사이에 낀 맏딸은 씨걱거리며 살세게 달리는 깜깜한 땅굴이 무서운 듯 연신 고개를 돌려 힐끗거리다 둘째는 머슴애, 엄마의 오른손을 꼭 잡고 휘둥그레 세상을 익히는 눈치다 천원 한 장에 두 켤레라고 꼬두기면서 목이 쉬어버린 요술장갑장수가 그 앞을 막 지나가다 아뿔사, 집을 나설 때 나는 약을 먹으라는 아내의 말을 깜박 잊어버리다

 

 


 

 

문덕수 시인 / 선에 관한 소묘 5

 

 

한 가닥

선이

여윈 내 손목을 묶어 보고,

몇 번이고 내 모가지를 묶어 금빛으로

졸라 보고,

벽 못에서

풀려 내려온 노끈이

누나의 모가지를 졸라 죽였다.

그 때의 눈알

그리곤/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창녀의 치마끈이 되었던

한 가닥/ 선이,

경부선(京釜線) 레일로

시장댁(市長宅) 뜨락의 살의(殺意)의 나뭇가지로

십년 전의 누나 얼굴로 돌아갈 수 없는

한 가닥

선이,

지중해 연안(沿岸)을 구석구석 더듬은,

내 누나 같은

낫세르 중령(中領)의 눈동자 속에

지중해의 윤곽으로 들어앉아

쉬고 있었다.

 

 


 

문덕수(文德守) 시인 1928-2020

1928년 경남 함안 출생. 호는 심산(心山), 청태(靑笞). 홍익대학교 국문과 및 고려대학교 대학원 졸업. 1956년 {현대문학}에 <침묵>, <화석>, <바람 속에서>가 추천되어 등단. 1964 현대문학상?1978 현대시인상, 1981년 아카데미 학술상, 1985 펜문학상 수상. 시집: {황홀} {선(線)·공간(空間)} {새벽바다} {영원한 꽃밭} {살아남은 우리들만이 다시 6월을 맞아} {다리놓기} {문덕수시선} {조금씩 줄이면서} {그대, 말씀의 안개} 등. 홍익대학교 교수. 2020.3.13 타계(향년 9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