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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원 시인 / 은금동 불빛 -김시일에게
고하도 빠져 제주도 이어지는 뱃길에 뚝, 뚝, 붓꽃 빛깔로 노을이 떨어져 지나치는 배들도 자취를 끊으면 온금동 산비탈 달동네에는 가난한 불빛 하나 먼저 반짝입니다. 아내는 미술학원 강사로 밤일 나가고 돌맞이 어린 자식 잠든 단칸방 부두 잡역부 일당으로 시집을 산 젊은 문학도는 붓꽃 빛깔 바다가 끝내 눈이 시려워 온금동 달동네에 저 혼자 불빛 되어 반짝입니다.
-시집 『마음속 붉은 꽃잎』에서
송기원 시인 / 들국화
그대와 나는 어쩌면 그렇게도 무지할 수 있었을까요. 십 년도 넘게 피투성이가 되어 찾아 헤매던 것이 찾다가 지쳐 끝끝내 서로를 할퀴게 하던 것이 들판의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피어나서 저리도 선명한 빛깔로 나부끼고 있습니다. 결코 어렵지 않게, 한 잎 추상도 없이 그대와 내가 서로 할퀸 자국을 어르고 있습니다.
송기원 시인 / 女舍를 지나며
언젠가 밤늦은 삼각동 가로등 아래서 파리한 웃음으로 내 손을 잡아끌던 그대가 언젠가 천호동 술집 거리 남매집에서 발가벗고 유행가 가락을 뽑던 그대가 언젠가 영등포 공장지역에서 정체불명의 사내들에게 끌려가던 그대가 언젠가 상계동 판자촌에서 불도저에 밀려 세간살이와 함께 나뒹굴던 그대가 언젠가 최루탄 연기 자욱한 신촌 로터리 부근에서 뜨거운 함성으로 달려가던 그대가 오늘은 두터운 흰 벽 속에서 무슨 꽃으로 피어나 저리도 가슴 떨리는 꽃향기를 나에게 보내는지요.
-시집 『마음속 붉은 꽃잎』에서
송기원 시인 / 복사꽃
갓난애에게 젖을 물리다 말고 사립문을 뛰쳐나온 갓 스물 새댁 아직도 뚝뚝 젖이 돋는 젖무덤을 말기에 넣을 새도 없이 뒤란 복사꽃 그늘로 스며드네 차마 첫정을 못 잊어 시집까지 찾아온 떠꺼머리 휘파람이 이제야 그치네.
송기원 시인 / 배꽃
건너 배밭에는 배꽃들이 한창이어서 해종일 벌나비들이 잉잉거리네 밭일을 하다말고, 젊은 과수댁 고쟁이 까서 소피 볼 때 홀연히 어지러워라 해종일 잉잉거리는 벌나비만이 아니라 삼년 넘게 굳게 닫힌 이녁의 자궁 안에 난만한 것들!
송기원 시인 / 해당화
목소리에도 칼이 달려, 부르는 유행가마다 피를 뿜어내던 어린 작부 붉게 어지러운 육신을 끝내 삭이지 못하고 백사장 가득한 해당화 터쳐나듯 밤바다에 그만 목숨을 던진 어린 작부
송기원 시인 / 숫처녀
열아홉, 스무살짜리 떠꺼머리 손님이 아짐씨 함시롱 달라들면은 오매, 벌받을 소리제만 나가 꼭 그만한 나이의 숫처녀 같어라우. 뭣이냐, 보리밭 속에서 하늘이 빙빙 돌고 종달새가 지지배배 지지배배 울어쌓고 보리까시라기는 가심이며 귓볼을 찔러대고…… 나이가 먹응께 이런 것까장 헛보인단 말이요.
-시집 <마음속 붉은 꽃잎> 에서
송기원 시인 / 풀벌레 울 때
나이 사십에 접어드니, 그리움도 저 풀벌레 울음소리를 닮아 시들어 땅에 깔리는 잔풀들 사이에서 들릴 듯 말 듯 그리운 이름들을 불러봅니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숨가쁜 시절에 먼 곳으로 떠나거나 혹은 숨어서 그리운 이들은 모습이 없고, 차마 떠나지 못해 캄캄한 어둠으로 이 땅을 헤매는 이들의 신음소리만 내가 부르는 소리에 섞여 옵니다. 신음소리의 맨 끝에서 병든 그대 또한 안간힘으로 내가 부르는 소리에 섞여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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