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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현숙 시인(상주) / 한강은 흐른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4.
김현숙 시인(상주) / 한강은 흐른다

김현숙 시인(상주) / 한강은 흐른다

 

두물머리에서 안양천 합수부까지​

유유히 흘러가는 저 강물에​

제3 한강교에서 월드컵 대교까지​

쭉쭉 뻗어나가는 도로마다​

씽씽 달리는 승용차 천국이다

이렇게 아름답고​

이렇게 부지런하고​

이렇게 활기찬 국민이​

빛나는 오 천년 역사를 가진​

금수강산 잘 지키자

굽이굽이 흐르다 보면​

철새가 쉬어갈 밤섬도 있고​

유람선 떠다니는 선유도가 있는데​

피의 절벽 절두산 성지가​

붉은 노을에 물들고 있구나

삼천리 방방곡곡에​

침략은 쉴 틈이 없고​

휘두르던 장검이 부러져도​

수도를 지키려고 애쓰던 모습이​

이름 없이 죽어갔네

피로 지킨 이 땅에​

분열이 웬 말인가?​

38선도 모자라서​

촛불이겨라, 태극기 이겨라​

한강아, 오호통재로다​​

 

 


 

 

김현숙 시인(상주) / 달팽이

 

 

뼈대 없이

옮겨 다니는 건

살이 닳는 고통뿐이다

걸친 것 없는 한 몸뚱이를

세상이 먼저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나를 가려주는 건

한두 겹 옷, 헐렁한 집뿐이다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집채만한 체면과도 늘 동행이다

내가 들통나지 않는

허술한 그늘 속에 돌아누울 때

때때로 꿈꾼다

작열하는 저 태양속으로 뛰쳐나가

내 온전한 살 뜨겁게 달아오르며

목숨의 한때를 맛있게 굽고 싶다

바람에 흐느적거리는 저 잡풀같이

 

 


 

 

김현숙 시인(상주) / 자작나무 숲을 보았다

​​

 

길 하나를 내어주며

신神은 곁가지를 허락하지 않았다

불거져 나오는 어떤 원願이든

자르면서 키가 자랐다

한 뼘씩 자란 키 속에

사랑이, 이별이 들어있다고

까만 밑줄 그어놓은 날들

이런저런 추위에

달님 별님 따뜻한 입술 대는 곳

 

이 낯선 숲에 열외列外하나

울컥거리는 파도로 밀려왔다

바깥은 온갖 경보로 휘청거리는데

여기는 정연整然한 안쪽

환한 걸음사위에 어떤 꼼수도 없다

각자의 생이 곧고 길고 서늘하게

단단한 자신의 회초리가 되어 꽂히자

산이 일순 하얗게 점멸點滅한다

번쩍 눈을 떴다.

흰 산이 된 자작나무 숲에서.

 

 


 

 

김현숙 시인(상주) / 백련

 

 

얼핏 들떠 보이나요

하긴 무릎에 늘 물살을 얹고 살아가야 하니까요

이리저리 밀리지 않고는

여린 몸을 버티는 정신의 등(燈) 하나 달아맬 수 있나요

달처럼 맘껏 구름을 차내며 환해지고 싶죠

그나마 한 해 사흘은 휜다면서요

저절로 불이 들어와

무명(無明)의 몸 밖으로 빠져 나올 그때거든요

 

한 번만이라도 회산 방죽으로나오세요

대명천지를 더 밝히는 불빛이 물에서 뭍으로 오르죠

칠월에서 구월까지 길은 이어지는데

길 다 두고 남 따라 포개어 걷는 연잎의 짙푸른 어둠

몇 길 물밑 허공을 밟고 선 꽃의 찬 이마

그 어디쯤 덜컥 오욕 칠정의 붉은 고뇌도 갇혀 있어요

 

무심한 듯 바람이 밀고 가죠

흰 빛을

멀리 갈수록 맑디맑게 개이는……

 

 


 

 

김현숙 시인(상주) / 새

 

 

어린 풀들 사이를 거닐다

나뭇가지에 푸른 생각을 걸어놓는다

물 위를 총총총 걸어다니는 친구도 있다

나무처럼 땅에 매이지 않고

돌멩이처럼 물에서 가라앉지도 않는다

말하고 싶을 때 노래한다

갖은 빛깔과 모양새로 덧칠하지 않으며

짧게 때로는 더 짧게

너무 배불리 먹지 않고

또 세상을 움켜쥐듯

눈부릅뜨고 훑어보지도 않는다

이러니 세상이 의심없이

천지간을 다 내어주나 보다

신이 부를 때는

두려움 없이 하늘로 튕겨 오르지만

원하는 건 다만

마음의 길을 가는 것

몸에 짐을 쌓지 않는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때로는 더 가벼이 흩날리는 홀씨

 

 


 

 

김현숙 시인(상주) / 짝

 

 

지하철로 이어진 엘리베이터

한 손으로 버턴을 꽉 누르고

다른 손으로 누굴 부르는 할멈

몇 명의 탑승객들이

그 손 하나 밀쳐내지 못한다

 

젊어서는 공 차듯 지구를 차며

분주히 뛰었으리

술 취해 전봇대도 걷어차고

못난 처 뒤로하고 앞장서서 걸었을,

한 때 세상을 감아 들였을 저 다리

지금 뒤뚱거리고 있다

허둥거리고 있다

 

할아범 발밑으로 꺼진 힘이

저 내미는 손에 얹혀있구나

 

 


 

 

김현숙 시인(상주) / 저 반달을 타고 간다면

 

밤하늘에 반달이 떠 있다

저 예쁜 쪽배에 오른다면

망망대해 건너는 것도 호사겠다

 

하나, 둘, 셋...

별들 환하게 켜놓고

마중하는 어머니

맨발에 엎디어 곡진曲盡하게

그 생애 눈물로 퍼낸다면

 

거기까지

혼자서 두리번거리는

하늘바다는 꽃밭이겠다.

 

 


 

김현숙 시인(상주)

1947년 경북 상주시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 졸업. 1982년 월간문학 등단. 1989 윤동주 문학상 수상, 2019 이화문학상 수상, 중등 교사, 연화주민복지관 도서관 관장 외. 저서 『유리구슬 꿰는 바람』 『마른 꽃을 위하여』 『쓸쓸한 날의 일』 『꽃보라의 기별』 『그대 이름으로 흔들릴 때』 『내 땅의 한 마을을 네게 준다』 『물이 켜는 시간의 빛』 『소리 날아 오르다』 『아들의 바다』 외 다수. 서울시인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