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주 시인 / 오래 고인 어둠
눈창을 닫아도 눈창을 열어도 딸기에 딸기씨앗들 촘촘 박히듯 빛의 씨앗들 촘촘히 박힌 어둠이다. 양변기에 물을 내리듯 시간이 다 흘러내리고 고인 어둠이다.
지독한 어둠이다. 원액의 어둠이다. 기침소리조차 헤어날 수 없는 뻘 같은 어둠이다. 입안 가득 고여오는 끈적한 어둠.
어둠을 뱉어내며 점점 뻘 속으로 빠진다. 자진해서 어둠의 감옥에 갇힌다. 어둠의 감옥에 갇혀 간절히 원하다 마침내 보고픈 어둠의 알몸.
이상하다, 점성이 강해질수록 나는 어둠 속에서 점점 투명해진다. 딸기의 딸기씨앗마냥 보이지 않는 구멍으로 쫓아오는 수천 수만 빛의 눈동자. 피처럼 입 안 가득 자꾸만 엉기는 어둠. 어둠의 비린내. 이건 내가 갈망하는 어둠의 체취가 아니다.
내 몸은 어둠의 비린내에 싸여 바닥에 눕혀진다.
이승주 시인 / 거름꽃
고등학교 동기 모친상의 문상을 마치고 함께 장례식장을 나오면서 내 친구 최윤영에게 물었다. 학교 때부터 이미 한 자리쯤은 따놓은 당상이라 믿었지만 오십 줄을 꿰었어도 여태 독립군처럼 사는,
그래도 얼굴은 좋데. 그게 속이 다 썩어 거름이 되어서 안 그렇나.
그게 속이 다 썩어 거름이 되어서 안 그렇나, 그 말이 오래 가슴에 가라앉지 않고 맴돌다 기어이 한 사람을 불러내고야 만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들의 가장 오래된 이름으로, 피우실 그 무엇이 남아 아직도 거름이 되시는, 그 거름의 힘으로 제 먼저 스스로 꽃이 되신.
이승주 시인 / 동다송*시대(東茶頌時代) 2-그해 가을
1 볼품없는 열매를 위해 꽃들은 헛되이 투신했다.
2 쓸쓸하게 밤비소리가 들려준 어둠의 나라로 불면의 영혼들을 싣고 떠난 풀벌레들 울음마차. 먼 산들이 몸을 바꾸어 겨울보다 깊은 계절을 건너는 동안 배암처럼 재빠르게 풀섶으로 사라진 물길들은 얼음의 고치를 준비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계란껍질처럼 얇아지고 겨울이 닥치기 전에 폭설이 먼저 내렸다. 여기저기서 이웃들 사이에 다리가 무너지고 고치가 있는 사람들은 귀가를 서둘렀지만 손끝이 시린 풀잎들 근심의 잔뿌리 더욱 깊었다.
*대구 중앙로 전통찻집.
이승주 시인 / 사과나무에게 물었다
꽃피는 사과나무 아래 섰을 때 내 안의 바구니장수가 사과나무에게 물었다
전생에 나는 무엇이었노?
사고나무 속에 깃든 스승이 내 안의 바구니장수에게 말했다
전생에 너는 사과나무이었노라 사과나무에 매달린 맛있는 사과이었노라
사과나무가 제 그림자를 끌어당기자 허공으로 새 한 마리 나라올랐다 스승은 한 손을 들어 출렁거린 하늘의 빈 자취를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전생에 너는 함부로 팔매질한 어린 짐승이었노라 네가 함부로 발길질을 한 길가에 핀 풀꽃이었노라
어둠이 숲에서 나와 영토를 넓힐 즈음 이번에는 스승이 내 안의 바구니장수에게 물었다
너는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인가?
이 밤 사과나무 꽃그늘에 앉아서 저 한늘의 전등을 새로 갈아끼우고 생각하고 또 곰곰 생각한다
이승주 시인 / 삼월 말일에 내리는 눈
1. 새소리 떠나간 지 오래,
소음기가 고장난 도시.
화사한 젊은 날도 없이 화장이 잘 받지 않는 오십의 벚꽃나무 가로수 터널 위로 하늘의 커다란 벚꽃나무 꽃잎
꽃잎이 진다 아득히 물속으로 가라앉는 도시.
물 속까지 내리는 천상의 벚꽃나무 꽃잎들,
2. 목련나무에서 몇 송이 목련꽃이 핀다 해서 봄이 온 건 아니다.
하늘의 커다란 벚꽃나무가 다 져야 봄이 오는 것이다.
이승주 시인 / 잉어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는 그를 가만 내려다보노라면, 그의 코가 어딘지 잉어를 닮았다. 안으로 소용돌이치는 그의 얼굴 한가운데서 격하게 열렸다 닫히는 아가미. 어디서 온 잉어일까. 잉어도 운다는 말, 그 새벽이 문득 떠올랐다. 아마도 슬픈 잉어는 그를 떠날 수 없다.
이승주 시인 / 어느 날 비닐하우스 옆을 지나다 우연히
어느 날 비닐하우스 옆을 지나다 우연히 차마 못 볼 것 보았다 반쯤 올려진 깻잎하우스의 비닐창 틈으로 마침내 드러난 살육의 참상 살점 한 잎까지 다 발겨 뜯긴 후에 뼈대만 버려진 그 현장 벚꽃이 지고 감자꽃이 필 때 출퇴근길 그 옆을 지나며 하우스일 하던 인부들의 구부정한 허리를 부지런하다고 존경한 적 있지만 생각들의 살점을 발라내고 나자 자꾸만 목에 걸려오는 억센 두려움의 가시 물기를 털어내며 삼겹살을 싸고 있는 딸에게 어떻게 설명할까 밤마다 번갈아 꺼지고 켜지는 하우스의 불빛을 성가셔 했지만 그것이 김씨 장씨의 꿈이라고 한 말들을 이제 다시 고친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현숙 시인(상주) / 한강은 흐른다 외 6편 (0) | 2026.01.04 |
|---|---|
| 민영 시인 / 겨울 강에서 외 6편 (0) | 2026.01.03 |
| 이문희 시인 / 내일은 꽃 외 4편 (0) | 2026.01.03 |
| 박형권 시인 / 아버지의 걱정 외 6편 (0) | 2026.01.03 |
| 배영옥 시인 / 훗날의 장례식 외 6편 (0) | 2026.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