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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문희 시인 / 내일은 꽃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3.
이문희 시인 / 내일은 꽃

이문희 시인 / 내일은 꽃

 

 

내 몸에 귀신이 산다 했어요

밤 12시면 할머닌 시루떡에 십자 성호를 그은 후

머리맡에 칼을 놓아두셨죠

 

꿈속에 칼춤을 추며 귀신이 다녀갔나 봐요

흘리고 간 붉은 꽃잎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밤새 열병이 오르락내리락

내 몸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 구멍이 숭숭 뚫렸대요

 

엄마는 내 앞에서 웃고 내 뒤에선 울어요

밤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신에게

뒤란 장독대는 빌고 또 빌어요

 

지하에선 꽹과리와 징이 춤을 추나 봐요

또 비가 와요 천둥 치고 하늘 깨지면

비에 떠내려간 구두 한 짝 천장에 둥둥 떠 있어요

 

어릴 때 죽었다던

먼 친척 아가가 내 이름을 부르며 악을악을 울 때면

어디선가 할머니 목소리가 들려와요

얘야, 누가 불러도 대답하면 안 돼 절대 따라가면 안 돼

솜이불처럼 포근한 할머니

 

살면서 누군가를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했죠

누운 곳이 요람이었다가 무덤이 되기도 한다는 거

내 몸에서 자라는 꽃을 뚝 뚝 분질러요

자꾸만 태어나는 꽃잎

 

나는 무럭무럭 커갔어요

싱싱하게 늙어가도록 내버려 두었어요

 

 


 

 

이문희 시인 / 생일

 

 

오늘 저녁은 천천히 늙고 싶어요

백 년 전 쓴 시를 읽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요

어찌 알았을까요

일생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는 걸

급히 마음을 쓸어내며

밥 한 술 뜹니다

왠지 눈이 떠지질 않아요

찬 미역국 뜨겁게 밀어넣는데

동공이 시든 꽃을 꼭 닮았나요

불치에 걸린 아이 같아요

장난감을 삼킨 강아지 같아요

 

아, 촛불 켜는 걸 잊었어요

 

 


 

 

이문희 시인 / 재활용센터로 가는 길

 

 

시인의 역작을 재활용센터에 모신다

밤을 잊은 고뇌의 산물

자부심 다칠세라 공손하게

 

손바닥만한 벽면 가득 지킨 파수꾼

신출래기 시인의 뜨거운 심장 녹인 야심작

부활을 기원하여 재생의 길로 보낸다

보다 멋진 명작으로 다시 만나자

부끄러운 약속 두 손 모은다

 

고향집 앞마당 닮아 작은 서재

너를 보듬어 꿈꾸던 불면의 밤들

이제는 발 뻗을 자리마저 없어

너를 보내고

 

작은 여백이 생긴 자리

오랜만의 아내 미소 낯설다

 

 


 

 

이문희 시인 / 오늘의 날씨

-이별주의보

 

 

 나 오늘 활짝 펴도 되나요?

 

 매일 죽음을 입고 벗지만 정작 우리는 죽음을 모르죠 그래서 당신과 나 사이엔 기압골의 영향으로 편서풍이 분대요 눈물은 잘 마를 거예요 나는 너무 밝은 게 탈이지만 당신은 언제나 폭풍 같죠 그래서 세상은 폭풍전야예요 그래요 밤새 벼락을 맞거나 국지성 호우에 떠내려가기도 하겠지만 그깟 피지도 않은 꽃잎이 대수겠어요 우울의 강수량70퍼센트 연애에 실패할 확률 99.99mm 붉은 칸나가 피었어요

 

 나 오늘 활짝 죽어도 되나요?

 

 


 

 

이문희 시인 / 옮긴이의 말

-지금 뭐해요, 고흐씨

 

 

 중요한 것은 몇 년을 어떻게 살았느냐가 아니라,어떤 태도로 살았느냐다. “영혼에 깊이 새겨진 것은 영원히 살아 있어서 계속 그 대상을 찾아다닌다.”라고 고흐는 말한다. 난 인생의 숫자를 기입하느라 이른 새벽 강가 물안개를 보지 못했다. 서른일곱 개의 여름을 어떻게 오십 개의 여름이 이해하겠는가. 하지만 내가 사라지기전까지 다시 볼 여름이 설렌다. 그리고 고백컨대 당신을 안 이후로 내 삶은 변한 것이다. 기억을 바꿔야 삶이 달라지는 것처럼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그러나 결코 그리지 않은 그림인지도 모른다.”라고 고흐 당신은 말한다.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당신을 꿈꾸게 했다.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라는 문장을 떠올린다. 예술가의 광기에 감염된 우리의 영혼은 진화한다.

 

 라고

 나는 여기까지 쓴다. 창밖으로 사이프러스가 보이는 밀밭이 출렁인다. 오후까진 서둘러 글을 마쳐야한다. 고흐의 또 다른 자화상을 보기 위해서다.생 레미 요양병원 지하실에서 발견될 그 그림은 테오가 그렸다면 따듯한 블루가 인상적일 것이다. 입가의 미소가 느리게 오는 슬픈 같은. 오늘 밀밭엔 유독 많은 까마귀 떼가 날아와 놀고 있다. 다리가 튼튼한 청람빛 까마귀에게 이 편지를 묶어 보내야 한다. 서쪽에서 유성이 밤 아홉시에 떨어진다고 했으니, 론 강까지 날아가는데 무리가 없으리라. 나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아를의 밤하늘엔 당신을 위한 키스로 가득 찬다. 죽음을 맞이하는 별처럼.잘가요 빈센트.

 

* “ ”는 『영혼의 편지』

 

 


 

이문희 시인

전북 전주 출생. 2015년 《시와 경계》 신인우수작품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전라북도 산천은 노래다』 『맨 뒤에 오는 사람』. 2021년 전북문화관광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전북시인협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