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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룡 시인 / 그리운 뒤쪽
폭풍처럼 몰려다닌다. 젖은 길을 검은 안개를 휘젓고 사라진다. 소음기도 없이 질주하는 무리들은 늘상 혼자다. 정처(定處)가 없거나 무서워서다.
양지쪽에 핀 장미나 개나리도 그렇다. 담벼락 아래 겨울 한복판에 유서라도 서 놓은 듯 어디서나 핀다. 꽃이 피고 꽃이 지는 때라는 게 따로 없다고 머뭇거리지 않는다.
모래 폭풍 일고 하늘이 뿌옇다는 먼 이웃의 행성에서 보낸 그림엽서라면 좋겠다. 돌아볼, 뒤쪽이 없다.
신덕룡 시인 / 동지(冬至)
폭설이다. 하루 종일 눈이 내려 집으로 가는 길이 지워졌다. 눈을 감아도 환한 저 길 끝 아랫목에서 굽은 허리를 지지실 어머니 뒤척일 때마다 풀풀, 시름이 날릴 테지만 어둑해질 무렵이면 그림자처럼 일어나 홀로 팥죽을 끓이실 게다. 숭얼숭얼 죽 끓는 소리 긴 겨울밤들을 건너가는 주문이리라. 너무 낮고 아득해서 내 얇은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눈그늘처럼 흐릿해서 들여다볼 수 없다.
신덕룡 시인 / 축분(畜糞)을 뿌리며
모든 출구가 단단하게 차단되었다 오래된 이 냄새는
밀폐된 포대 안에서 몸을 부풀리고 뒤척이며 때를 기다리다 삽날에 콱 찍히는 순간 폭탄이라도 터지듯 사방으로 뛰쳐나온 것이다
비좁은 축사에 앉아 되새김질하던 어미 소의 반쯤 뜬 눈 꿀꿀대며 머리를 들이밀던 돼지들의 콧구멍 저기 한쪽 구석에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며 흘리던 눈물까지 질퍽거린다
오로지 먹고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안으로 파고드는 고통을 다스리느라 속이 썩어버린 마침내 한 무더기로 쏟아놓은 생의 잔해들이다
길이란 길 다 무너지고 나서야 길 끝에서 발걸음 가볍게 다음 생이 도래한다는 듯
묵은 기억들 갈아엎고 환한 고중에, 서둘러 흩어지는 발자국들 소란하다
신덕룡 시인 / 매미껍질
소매치기라도 당한 듯 이렇듯 쭉 찢어진 보따리도 있는가. 어둠과 습기 머금은 달빛들이 빠져나갔다. 더듬이를 세우고 어금니를 앙다물던 애벌레의 숨결이 빠져나갔다. 소리통이 되기 직전의 위험천만의 순간도 빠져나갔다. 텅 비웠다 오랫동안 밤낮 없이 목숨껏 쟁여온 것들 여름 한철, 탕진해버리겠다고.
늦더위도 끝물인 걸 보면 후생後生에도 허겁지겁 챙겨갈 게 많겠다
신덕룡 시인 / 말벌과 다람쥐
쳐다보지 말 것, 여기는 높고 위험하니 얼른 지나가시오.
용추폭포에서 제2 수원지로 내려가는 길목, 한쪽 절벽 끝에 커다란 말벌집 구멍이 뻥 뚫린 채 거꾸로 매달려 있다. 알록달록 외벽에 그려진 물결무늬는 이 등성이 저 등성이 돌아다니며 고사목, 연한 목질을 꼭꼭 씹어 이어 붙였던 시간의 물컹한 속살이겠다. 한껏 입 벌린 구멍 또한 지난 여름 허기진 일벌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던 문이었으니, 이마에서 떨어진 부지런한 땀방울들은 몇 말, 몇 드럼이나 되었을까.
추위가 몰려오기 전에 살림을 작파하고 떠난 빈집 같아 괴괴하고 쓸쓸한데
거기, 순한 눈 두리번거리며 다람쥐 한 마리 들어앉았다.
누구도 감히 발 들여놓은 적 없던 두려움의 문턱을 넘어 스며들었다. 폐허의 적막이 한겨울을 건너가는 숨소리로 채워졌다.
신덕룡 시인 / 백일홍
저 안에 누군가 앉아 있다. 시월의 문턱을 막 넘어 선, 환한 절정
가스라진 귀밑머리 축 처진 어깨위에 몰아쉬던 한숨들 덕지덕지 많다. 힘들었겠다. 가지마 다 피우고 지우고 지운 자리에 또 꽃피웠으니 떨어져 누운 꽃잎들 모두 전생이었을 터, 여러 생이 한 몸이었구나. 바싹 말라 비틀어진 자리가 경계다. 한 번도 저쪽으로 넘어가거나 이쪽 으로 훌쩍 건너 뛰어보지 못한
그 길, 반들반들 닳았겠구나 한 시야(視野) 급하게 트이는 걸 보면.
신덕룡 시인 / 화투 치는 여자
부다가야에서 화투 치는 여자를 만났다*.
길고 지루한 여행을 끝장낼 요량으로 게스트하우스에 '하우스'를 차렸다고 했다. 광 팔고 똥 팔 사람은커녕 멤버는 달랑 갈 데 없는 영혼 둘, 고와 스톱이 전부였다. 땀 뻘뻘 흘리며 화투 장에 침 발라가며 밤낮없이 2박3일, 고냐 스톱이냐를 묻는 게 일생을 걸었던 부처님의 도박에 미치기야 하겠냐며....... 끼어들 수 있느냐고 그대 곁에 잠시 곁방살이할 수 있겠냐고 물으니 고개를 젓는다. 판이 너무 커서 초장에 멍들거나 나자빠질 정도면 다행, 패가망신하기 십상이 라는 눈빛이다. 눈빛을 거두는 그녀의 얼굴과 가슴이 지워지고 짓무른 엉덩이만 허공에 슬쩍 떠올랐다. 햇볕 쨍쨍한 대낮이었다.
*이화경, 『울지마라, 눈물이 네 몸을 녹일 것이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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