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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탁번 시인 / 둥둥이
제비집에서 제비 새끼가 떨어지면 옛 어른들은 말했다. -올 여름 큰 장마지겠다 큰 장마 들면 날벌레가 드물어 새끼 먹이가 줄어든다는 걸 미리 아는 제비가 새끼 몇 마리는 아예 버린단다
올해 우리 집 제비가 딱 그렇다 알에서 깬 지 얼마 안 된 새끼가 바닥으로 자꾸 떨어진다 조심조심히 제비집에 다시 넣어 주지만 좀 있으면 또 떨어진다
아니나 다를까 올 장마가 기상관측 이후 최고란다 하루 걸러 강풍에 천둥에 장대비다 제천 지역 80mm라고 예보가 나오던데 80mm는 커니와 평상에 놓인 한 병 크기 유리병에 빗물이 가득 넘친다
제깟제비도 여름 장마 미리 알아채고 제비 새끼를 본 옛 어른들도 앞날을 훤히 헤아리는데 나는야 낫살이나 먹고도 코앞 가늠도 못하니 정녕코 여든에 둥둥이렸다?
-《다시 올 문학》 2022년 10월 가을호
오탁번 시인 / 눈뜬장님
연애할 때는 예쁜 것만 보였다 결혼한 뒤에는 예쁜 것 미운 것 반반씩 보였다 10년 20년이 되니 예쁜 것은 잘 안 보였다 30년 40년이 지나니 미운 것만 보였다 그래서 나는 눈뜬장님이 됐다
아내는 해가 갈수록 눈이 점점 밝아지나 보다 지난날이 빤히 보이는지 그 옛날 내 구린 짓 죄다 까발리며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눈뜬장님 노약자한테 그러면 못써!
오탁번 시인 / 송이버섯
ㅡ국민들께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들이 검찰에 출두하면서 곧잘 하는 말이다 국민들이 마음으로 근심한다고? 별 미친놈 다 보겠네 에라, 송이버섯깔 놈들아!
오탁번 시인 / 블랙홀
같은 동네에 사는 이종택과 함께 백운지 아래 방학리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 김종명이네 집에 놀러 갔다 멍석에 널린 고추가 뙤약볕같이 따갑고 함석지붕에는 하양 박이 탐스러웠다 누렁이 한 마리가 마당에서 제 똥냄새 맡다가 꼬리를 쳤다 찰칵! 한 장 찍고 싶은 우리 농촌의 옛 풍경 속으로 재작년 추석 무렵에 무심코 쑥 들어갔다
안방에서 머리가 하얀 안노인네가 나왔다 어릴 때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나는 어른들께 답작답작 큰절을 했다 그러면 친구 어머니가 씨감자도 쪄주고 보리쌀 안쳐 더운밥도 해주곤 했다 종명이 어머니가 여태 살아계시구나! 나는 얼른 큰절을 하려고 했다
그순간 몇 만분의 1초의 시간이 딱 멈추었다 종명이가 제 어머니에게 말하는 소리가 우주에서 날아오는 초음파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임자! 술상 좀 봐! 초등학교 동창 마누라에게 큰절할 뻔한 나는 블랙홀에 빠진 채 허우적거렸다
머리가 하얀 초등학생 셋은 무중력 우주선을 타고 저녁놀 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방학리에 왔으니 학 한 마리 잡아다가 안주로 구워먹자 씨벌! 종택이와 종명이는 내 말에 장단을 맞췄다 --그럼 그렇고 말고지, 네미랄! 광속보다 빠르게 블랙홀을 가로지르는 학을 쫓아가다가 그만 나는 정신을 잃고 종택이 경운기에 실려 돌아왔다
오탁번 시인 / 해피 버스데이
시골 버스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__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__먼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__버스데이 오늘이 할머니의 생일이라고 생각한 서양 아저씨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__해피 버스데이 투 유! 할머니와 아저씨를 태운 행복한 버스가 힘차게 떠났다.
오탁번 시인 / 시인학교
소월이나 미당 생각하면 시 쓸 맛 영 안나겠지만 재주는 좀 없어도 꾸준하게 쓰고 또 쓰다 보면 내신 1등급 5% 안에는 들지 몰라 1등 2등 다툴 만한 고은이나 김춘수가 사람이다 말씀이다 하면서 3등급쯤으로 자진해서 나가는 걸 보면 너희들 흰소리 작작 하고 이슬비 맞으며 홀로 울면서 빗방울 찍어서 손바닥에라도 가련한 시 몇 줄 쓰고 또 쓰면 지용쯤은 친구 삼아도 되지 않을까? 박용래하고는 맞술 나눠도 큰 흉은 안 될지도 몰라 하지만 내신성적이 뭐 대순가 실기시험으로 결판이 나는 거야 이 잡지 저 잡지로 너비뛰기 평론가 대학교수까지 높이뛰기 모든 욕 먹으며 오래달리기 심사위원 알음알음 턱걸이 하기 이쯤되면 소월이나 미당도 뒷발질로 넘어뜨리고 현대시사의 주동인물이 될 수도 있것다? (학생들 와글와글 선생에게 삿대질) 안 되겠다 시인학교는 오늘 당장 문 닫는다 나는 보따리 싸겠다 네미랄
오탁번 시인 / 나자르 본주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 기념품 가게마다 액운을 막아준다는 나자르 본주Nazar Boncugu가 푸른 눈깔 뜨고 째려보고 있다 액운은 언제나 사람과 사람 눈썹 사이에도 있는 법 나자르 본주를 열댓 개 사서 누이 또래 길벗들에게 노나준다
제우스Zeus가 아름다운 소녀 이오Io와 밀애를 나누다가 헤라Hera한테 들키자 얼른 이오를 암소로 만들고는 에헴 에헴 시치미를 뗐지만 매서운 헤라는 그걸 바로 알아채고 등에를 풀어서 암소를 괴롭혔다 몸이 가려워서 참지 못한 어여쁜 이오는 ‘암소가 건너간 바다’ 보스포루스 Bosphorus 해협으로 무작정 뛰어들었다
바로 그 순간! 을유문화사판 『그리스신화』를 읽던 나는 무시무시한 초음속으로 책 속으로 잽싸게 들어가서 이오의 가냘픈 목에 나자르 본주를 걸어주었다 보스포루스 해협에서는 오늘도 워낭소리 맑게 울리고 물결 이랑마다 나자르 본주가 반짝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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