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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휘민 시인 / 먼 시간에 대한 반응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3.
휘민 시인 / 먼 시간에 대한 반응

휘민 시인  / 먼 시간에 대한 반응

 

 

하나의 세계가 지나가도

질문이 뒤따라오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때 불현듯 현재는 미래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돌아갈 수 없다

되돌아갈 수 없다

그 책장을 넘기기 전의 나로는

 

 


 

 

휘민 시인 / 금성라디오

 

 

한 번도 제대로 된 주파수를 찾은 적이 없었다

은빛 안테나는 쉴 새 없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둥근 귓바퀴는 손끝에서 떠날 줄 몰랐다

그것이 얼마나 고단한 싸움이었는지

어지럼증을 느끼는 건 라디오만이 아니었다

 

붉은 왕관이 그려진 작은 라디오는

몸체보다 건전지가 더컸다

검은 고무줄로 두어 번 비끄러맨, 도시락통만한

그곳엔 시커먼 흑연들이 가득했다

 

언젠가 그 속을 들여다보았었지

그믐 밤 한 귀퉁이를 떼다 놓은 듯

컴컴하고 단단한 흑면 기둥

그토록 단호한 것을 감싸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부드러운 가루였다

 

분명 이 검은 가루들이 비밀을 알고 있으리라

 

주파수만 맞으면 김추자와 나훈아, 조용필을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내는 신기한 소리 상자

그 고단한 소리의 비밀을 캐기 위해

소리의 밥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 몸속 흑연 기둥이 닳아가도록

 

 


 

 

휘민 시인 / 눈사람과 몽당비

 

 

 해거리하는 늙은 감나무에 눈송이 내려앉으면 온 세상 잘 타 놓은 햇솜처럼 폭신폭신했지. 장독대의 금간 항아리들도 목련꽃송이처럼 활짝 피어서 온밤 내 뒤뜰이 봄 언덕처럼 환했네.

 

 아침이 되어 아버지는 눈을 쓸고 나는 아버지보다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기로 했네. 그러나 너무 깨끗한 눈은 잘 뭉쳐지지 않았지. 내 안의 어둠과 아집, 치기를 밀어 넣은 뒤에야 몸통 하나 내주던 겨울. 내가 밟고 지나온 발자국마저 거두어 머리 올리고 아버지의 싸리비 꺾어 눈도 붙여 주었네.

 

 오늘밤 또 눈이 내리고 고향집 금간 항아리에도 사박사박 하얀 어둠 쌓일 것이네. 밤새 조바심하다 새벽녘에 첫눈을 밟는 아이 이제는 없지만 아침 연기 흩어져 섣달 하늘에 스밀 때쯤 들릴 것이네. 싸르락싸르락 아버지의 비질 소리. 그 소리 놓칠까봐 창문이 훤해도 눈을 못 뜨겠네. 현관 밖에 몽당비 한 자루 서 있을까봐 눈 그치고 날 저물어도 문을 못 열겠네.

 

 


 

 

휘민 시인 / 전문가

ㅡ비인칭

 

 

그는 자신의 몸을 깊이로 바꿈으로써

인생의 주인이 되었다

 

길 위에 남겨진 망설임을 포기하고 나서

한 평도 안 되는 공간의 진짜 주인이 되었다

 

비석이 세워지고 이름과 생졸년이 기록됐지만

그는 없다

어디에도

 

그의 무덤 앞에서 침묵은

한참을 서성이다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한다

 

나, 라는 옷을 벗고

이제 막 우주의 한 면이 된

비인칭의 얼굴을

바람이 어루만지다 간다

 

지상에선 오늘도

갓 태어난 부고들이 날아들고

하늘과 땅 사이에

인칭을 벗어던진 나들이 활보한다

 

이제 막 자신과 동격이 된

한 사람의 고독을

무료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구름 구름 구름 구름들​

 

-계간 『시와 정신』 2024년 봄호 발표

 

 


 

 

휘민 시인 / 첼로

 

 

방 안 깊숙이 달빛이 걸어들어와 있었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굳어 있던 몸에서 새살이 돋아나고

하품을 하며 깨어난 당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우는 내가 있었다

 

누가 나의 잠귀퉁이를 흔들어 당신에게 데려갔을까

암실 속으로 들어와 닻을 내린 한 줄기 빛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나는 한밤중에

무릎을 껴안고 중력을 달래는 사람이 된다

 

짐승 같은 잠 속에 빠져

두 눈을 잃어버린 당신은 달의 뒤편에서

사나운 어둠을 길들이고 있는 사람

홀로 노를 저어 망망대해를 건너가려는 사람

 

활이 지나간 자리였을까

달빛에 베인 상처였을까

 

나는 한동안 당신을 생각하느라 어두워진 갈비뼈를 더듬는다

울림통이 된 몸에서 더이상 어둠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가만가만 창가로 다가가 커튼 자락을 여민다

 

그러나 살갗을 파고드는 먹물처럼

그림자를 지워도 사라지지 않을 마음의 얼룩

온종일 달아올랐던 바닥이 식는지

비틀린 관절을 꺾으며 집이 우는 소리를 낸다

 

 


 

 

휘민 시인 / 언니가 두고 간 물거울

 

 

가슴속 돌 덮개를 들어 올리면

세형동검을 닮은 빛이 내 동공을 찌르죠

어머니의 단말마가 젖은 빨랫줄을 끌고

구멍 뚫린 하늘로 날아가네요

제자리를 찾지 못한 별들의 웅성거림

흑백사진 속에서만 보아온

젊은 아버지가 언니를 안아 올리네요

 

언니 얼굴을 감싸는 하얀 손들이 있어요

매순간 기억들이 빛으로 실을 자아요

 

물빛이 흔들리네요

별똥별이 남긴 마지막 숨결과

버드나무 잎맥들 사이에서 재잘거리는 바람

나는 아직 물속에서 자라는 나무

그러나 아가미가 없죠

 

가장 먼 길을 돌아오는 씨앗의 고통으로

초록은 불평 한마디 없이 가을을 건너가죠

 

달빛이 바가지로 물속 어둠을 퍼내요

빛의 씨앗과 나무들의 전생을 버무려

젖은 물레를 돌려요

 

언니가 날숨으로

십 년 후에 태어날 나를 밀어내요

내가 들숨으로

기억 속에 잠든 언니를 깨워요

 

나는 언니가 두고 간 물거울

거울 주인은 수십 년째 우물 속에서 나오지 않죠

 

—시집 『중력을 달래는 사람』, 걷는사람, 2023.

 

 


 

 

휘민 시인 / 휘도

 

 동향집에서는 먼지를 숨길 수가 없습니다 마룻바닥에 내려앉는 작은 티끌 하나도 강아지가 떨어뜨린 털 오라기 하나도 아침에는 빛나니까요 해가 들면 먼지들은 당신을 향해 내딛는 내 발걸음 같습니다 당신이 잠든 사이 풀잎에 맺힌 마음은 백로에 내리는 이슬 같군요 하지만 아침잠이 많 은 당신은 온밤 내 당신을 향해 휘어지는 내 마음을 알지 못 합니다

 

 지금 나의 눈에 보이는 저 빛은 당신의 어제를 밝히고 남은 것입니다 밤 사이 두 겹으로 포개진 발그레한 꽃잎 위에서 바라보는 나의 동공과 새하 얀 빛으로 깜박이는 이성의 각도는 당신에 대한 믿음의 크기일까요 등을 돌린 채 수런거리는 가로등 불빛에도 꽃기린은 창 너머로 향하는 눈길을 거두지 못 합니다

 

 잎자루 밑에서 자라난 턱잎들이 가시가 되어가네요 꽃이 진 자리가 누 군가 벗어두고 간 헤진 구두 같습니다 동향집은 아침이 빨리 지나가고, 해 는 온종일 세상을 돌고 돌아 저물녘에 간신히 건너편 창가에 닿고, 계절을 앞당겨 쓰느라 나는 번번이 밤의 색깔을 잃어버립니다 내일은 꽃처럼 붉 어진 기린의 목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요

 

 


 

 

휘민 시인 / 아무것도 기록하고 싶지 않았던 아무 날의 일기

- 옮긴이의 말

 

 

 

오늘 오후에 엄마와 배드민턴을 쳤다.

- 아이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이가 처음으로 백핸드를 시도한 날이었다.

 

이 어려운 기술을 나는 두 번이나 성공시켰다.

- 아이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런데 셔틀콕이 나뭇가지에 걸렸다.

- 나는 느티나무 둥치를 잡고 흔들었다. 나무는 꿈쩍하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손에 들려고 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쉽게 물러날 엄마가 아니었다.

- 나는 갈라진 줄기 사이에 한쪽 다리를 걸고 간신히 손에 잡힌 나뭇가지를 붙들고 매달렸다. 나는 온몸으로 나무를 흔들고 나무는 꽁지 뽑힌 깃털의 무게만큼 나를 흔들었다.

 

셔틀콕이 바닥에 내려왔다. 결국은 엄마의 승리였다.

- 그러나 날개가 없는 나는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나무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나는 느티나무와 씨름하는 엄마가 스모 선수 같다고 생각했다.

- 자기 몸의 줄무늬를 세다 기린에게 들킨 얼룩말의 기분 연필 끝에 침을 묻혀 내 것이 아닌 감정을 기록해 두기로 했다.

 

거위가 최초로 비행을 시도했을 때의 자세는 어떠했을까.

신탁이라도 받는지 아이는 자면서도 입을 실룩거린다.

 

-시집 『중력을 달래는 사람』 (걷는사람, 2023)

 

 


 

휘민 시인

1974년 충북 청원 출생. 박옥순. 청주과학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 당선. 시집 『생일 꽃바구니』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 동화집 『할머니는 축구선수』. 그림책 『빨간 모자의 숲』. 숭실사이버대학교 방송문예창작학과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