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영숙 시인(철원) / 어느 자주독립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
이영숙 시인(철원) / 어느 자주독립

이영숙 시인(철원) / 어느 자주독립

 

 

 연명치료를 거부한다고 법적 문서*에 서명한 후

 어머니가 전화하셨다. 이제 됐다

 

 사나운 꼴 안보이고

 고요히 저물어가게

 

 살아서 죽지 않고

 죽어서 살게

 

 내 숨을

 내가 거두어 가게

 

 동네 복지관까지 출장 나온 담당자에게 고개 숙여 몇 차례나 사례한 후 노인보행기를 밀고 나오다 핸드폰 단축키를 꾹 눌렀을 구순 노모

 

 맷돌도 앉힐 수 있는 함지를 그네뛰기 대회서 상으로 받았던 젊은 날의 활기

 

 달이 참 높지막하니 떴구나 할 때의 말투

 

 일제히 떠올랐던 우전차가 향기를 다 내주고 가라앉을 때의 무게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이영숙 시인(철원) / 단 한 번만 말했다

 1

 대남방송과 북한군의 사격훈련 총소리가 들리던 곳

 지금도 제 보이는 북한 쪽 오성산에서 상시 관측이 가능한 곳

 철원군 근남면 사곡리

 대마리처럼

 북한에서는 최남단

 남한에서는 최북단

 영해박씨 집성촌으로 김씨와 이씨 등 타성바지가 스무나문 가구 섞였어도

 500여 호가 겹사돈 아니면

 누구는 왕고모 딸이고 누구는 오촌 당숙

 서로 일가붙이였는데

 38선 이북이라 광복 후엔 공산 치하

 마을이 공산주의자와 반공주의자로 일부 갈렸어도

 나머지는 사상이니 이념이니 모르고 농사나 참하게 짓고 살았는데

 6·25가 터지자 전세에 따라 이쪽저쪽 엄한 백성들이 전국에서 죽어 나갔듯 후퇴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원산으로 치달을 때

 누가 알았으랴 사각지대로 남은 사곡리를 인민군 패잔병과 열성당원과 중공군이 연합하여 기습할 줄을

 누가 알았으랴 반공 활동을 펼쳤던 화랑공작대원과 그 가족을 색출하고 얼결에 지목된 무고한 주민까지 70명을 무참히 살해할 줄을

 자다 말고 끌려 나온 열댓 명의 아이들에게도 여지없이 총구가 겨눠질 줄을

 1950년 11월 20일 그 새벽부터 피난민들의 시간은 더디 흘러

 휴전되고 이러구러 수복 이주 마무리된 1955년에야 분묘 조성되었으니

 피 흘리며 포개포개 구덩이에 던져진 시신들의 처참함을 어찌 눈감고 상상할 수 있었으랴

 1984년이 되어서야 합동순의비가 제막되니

 그들의 원혼을 어찌 달랠 수 있었으랴

 그리하여 이제 와 전쟁의 참상을 어찌 상상하지 않을 수 있으랴.

 2

 가해자가 피해자 되고

 엎치락뒤치락

 피해자가 가해자 되기도 하던 세상

 빨갱이가 제일 무서운 말이었는데

 김화 화강이 흘러

 한탄강 지나 임진강 지나

 한강에서 서해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죄에 연루되지 않았으나

 이웃과 친인척에 연루되어

 원망도 분노도 복수도 삼켜버린 채

 나는 그때 옌병을 앓아 아무것도 몰랐어요*

 옌병에 걸리지 않았어도

 빨갱이라는 아직도 살아있는 그 말이 너무 무서워

 화강은 태평양까지 툭 터놓고 흘러가기가 여전히 요원한데

 지정학상 수십수백의 민간인학살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를 철원을 통틀어

 『철원군지』에 실린 단 한 건의 학살 관련 사료!

 단 하나의 김화지구 합동순의비!

 밤에 뺏고 아침에 뺏기던 백마고지전투의 이 첨예한 철원에서

 정말

 인민군과 중공군, 국군과 유엔군에 의한 제2, 제3의 민간인학살이 없었을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말할 수 없었다

 

 


 

 

이영숙 시인(철원) / 맹지盲地

 

 

지하상가로 내려가는 계단참

노인이 앉아 있다

다닳은 비누조각처럼

출퇴근 인파보다 조금 늦게 출근하고

조금 더 일찍 퇴근해도

거품은 좀체 일지 않는다

 

아들인 며느린지

딸인지 사위인지

구형 승용차에서 내려 모셔다 놓는 계단참

흰스틱이 훤히 알고 있는 길을 따라 화장실을 다녀올 때면

휴대용 방석 위 빨간 플라스틱 바구니가 대신 근무하는 계단참

 

찬송가를 틀고

라이브로 팬 서비스도 하지만

기본 콘셉트는 명상

꾹 다문 눈의 기울기를 따라 설치된 난간을 잡고

몸의 성지를 순례하는 시간

 

기척이 느껴지면 바로 복귀할 수 있도록

내면의 사립문은 열어 두지

 

안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자유자재로 자신을 드나드는

노인에게는 다 그게 그거지만

 

누가 보거나 보지 않거나

진입로가 있거나 없거나

노인에게는 다 거기서 거기지만

 

 


 

 

이영숙 시인(철원) / 유산流産에 관한 두 개의 퍼즐

 

 

‘얼굴도 없고 이름도 없지만, 항상 저기 웅크리고¹⁾앉아

안 태어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음미하면서 아이들은

줄곧 자라 어느새 나보다 많이 늙었다

 

 

1

 어루만지던 것에 머물지 않기 뿌리치기 뒤돌아보지 말기 떠나는 자의 야망은 거침이 없다 차디찬 이마 펀펀한 가슴 자신부터 단칼에 벤다 콸콸 솟구치는 피 빠르게 냉각된다 재사용이 불가능한 알루미늄튜브 쓰레기통은 붐비고 신파는 멸종했다 돌아가는 길을 저장하시겠습니까? 무심한 손가락은 뇌보다 빠르다 급습당한 ‘아니오’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레일 위에 엎드려 자신의 폭발을 껴안는다 못처럼 납작해진 문장들을 영영 잃는다 봄날은 갔다

 

2

 과도기過渡期가 아닌 적이 없는 세상 과도기잖아, 들이대면 풀리지 않는 일이 없다 사과를 깎다가 살을 벤다 우산이 없어 비를 맞는다 징조가 난무한다 조건반사적 체질로 양질전화 중 반성은 금물 증거인멸은 필수 오, 자기연민이 새삼스럽게 들끓는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이 미약해지는 시대풍조 자신과의 공모共謀가 가장 힘이 세다 돌아가는 길을 저장하시겠습니까? ‘아니오’는 다 이해한다고 생각하며 통증 없는 대목을 마저 잃는다

 

¹⁾옥타비아 빠스, 『활과 리라』

 

 


 

 

이영숙 시인(철원) / 블라인드

 

 

햇살은 반으로 뚝뚝 분질러 내던지고

열기는 반의반으로 접어 돌려보냈습니다

 

재배치된 실내 시간이 남아

로즈 와일리展 도록을 펼쳐 드는데

끼워두었던 전시회 안내장이 툭 떨어집니다

 

'영국을 너머 전세계를 사로잡은 87세 할머니 화가'

 

나이보다 그림으로 알아봐 주길 바랐던 로즈와일리

안에서 밖을 심사하는 태도에는 긍휼이 없습니다

 

찻잔은 차를 감싸주느라 먼저 식어버리곤 합니다

한모금 넘겼을 뿐인데 가녀린 길이 지워져

실금을 밟았는지 중앙선을 침범했는지

세상사 음영의 높낮이가 절뚝거립니다

 

웃음소리를 돌려 깎으면 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입술이 되고요

 

한다발 꽂혀서 시들어가는 로즈와일리

 

어서 오세요

실력으로 뽑힌 당신

 

영국을 너머

영국을 넘어

 

어제도 그제도 무릎으로 툭 떨어지는

 

 


 

 

이영숙 시인(철원) / 포스트잇 위에 포스트잇

 

 

생활은 미제투성이라

이자처럼 메모가 증식한다

모니터 아래 턱수염이 자라고

 

누가 내 등에 감정을 누덕누덕 붙인 줄도 모르고

말해주는 이 하나 없어

끼리끼리 모여 사는 것 같아도

 

같이 여행하고 싶은 연예인은 누구인가

따위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며

되지도 않을 설문조사에 응한 사람들은 궁금하지도 않지만

 

음식물쓰레기 수거차가

땟국을 도로에 띠처럼 풀면서 가는 새벽이 줄자

어른들은 세상이 좋아졌다고 말하고

옛날이 좋았다고 말하는 어른들도 있어서

 

평생의 키스 횟수를 헤아려 보는 밤

아직 붙어 있는 납작한 키스 몇 개는 낡지도 않고

 

빚 위에 빚

 

조립식으로 구축된 모서리마다

잠이 안 오는 비

 

 


 

이영숙 시인(철원)

강원도 철원 출생. 1991년 《문학예술》을 통해 시 등단. 2017년 《시와 세계》를 통해 평론 등단. 서울예술대학을 졸업.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 시집 『詩와 호박씨』 『히스테리 미스터리』. 현재 추계예술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