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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황흠 시인 / 별자리를 훑다
밤이 깊어도 좀체 잠이 오지 않아 잡다한 생각을 털어 버릴 겸 잠바를 입고 마당에 나와 선다 세찬 바람이 까마득하게 제쳐 들어와 겨울 한복판을 매섭게 지나치는 서슬에 아름이는 머리만 들고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나를 본다 밤하늘에 별이 치렁치렁 달려 있다 별을 향해 별별 이야기를 건네보는 겨울밤 하나와 하나 사이는 얼마나 멀까 나와 나 사이의 거리를 재보다가 수억 광년 멀리 바라보는 건 아닌지, 고구마 넝쿨같이 뻗어가는 캄캄한 자리를 헤아리며 저 별 이 별, 하나 둘 세어 보다가 이별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외등을 본다 캄캄한 공간을 들비치는 불빛만큼 머뭇거리는 간절한 눈빛이 은하수에 잠겨 침침한 너와 나의 사이를 훑어본다
ㅡ『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9, 05)
김황흠 시인 / 남평장에서
수염이 까칠까칠한 사내가 입김을 토한다 닫힌 문을 열고 물건을 추스를 무렵 어둠이 가시지 않은 사위를 휘젓고 들어서는 어물전에서 갓 나온 생선들, 명태, 전어, 홍어, 갈치, 칠갑상어, 오징어, 낚지, 꼴뚜기, 석화, 굴, 꼬막, 바지락 감태, 파래 그리고 매생이…….
술 먹고 난 아침은 매생이국이 최고지 국밥집 한 귀퉁이엔 사내 몇 자리하고 해장을 한다 줄행랑쳐 간 시간의 샅바질 해장술 한두 잔으로 비워 내쳐 버린다 탁자엔 두툼한 손바닥이 넙치처럼 파닥거린다. 홍어가 못되어 늘 불만인 가자미 같은 눈을 굴리며 설거지하는 아짐, 오징어 보다 못한 신세타령엔 꼴뚜기가 한입이다
김황흠 시인 / 책장 사인에 귀뚜라미가 산다
벽과 책장 사이에서 열심히 소리를 짓는 것 같은데 형광등을 켜자 뚝 그친다 스위치를 내리고 다시 잠을 부르자
먼저 달려오는 소리 내 귀에다 붓는 애절한 노래 엷은 날개로 간절하게 책장 귀퉁이를 매만지는 가을밤
무심히 파르라니 떠는 페이지를 어디에 숨어서 읽고 있나
-시집 『책장 사이에 귀뚜라미가 산다』에서
김황흠 시인 / 어느 하루
비 짝짝 퍼붓는 하루, 밀쳐 둔 책 읽는데 -아야, 어디서 타는 냄새 난다 읽던 책 접어놓고 부엌을 이리저리 둘러보지만 눅눅한 습기 밴 어둠만 물컹물컹하다 -에이, 어머니 속에서 타는 것 같은디? 썩을 놈, 어머니 얼굴에 웃음이 돈다
-시집 <건너가는 시간> 푸른사상, 2018
김황흠 시인 / 억새는 억세다
드들강 생태하천은 몇 번의 물난리로 갖가지 관상수목이 죽었다 수목이 죽어간 자리마다 굳게 뻗어 나와 굳세게 흐드러진 억새들 흰 꽃들이 치렁치렁하다 산들거리는 바람은 따습고 윤슬 진 강 물살은 물고기 싱싱한 비린내를 풍긴다 낚싯줄 드리워놓고 바람소린지 휘파람 소린지 모를 새 한 마리 저음으로 지저귀다가 유유히 억새 군락을 날아다니는 동안 노을 은근히 젖어들고 산그늘 짙어지자 행장을 챙기는 낚시꾼 후줄근한 배낭을 집어 들고 축축한 자리를 빠져나오는 길은 흙 속으로 단단히 걷고 내리는 뿌리로 억세다
김황흠 시인 / 절집에서
부처님은 안 계시고 문턱 턱 베고 누운 누런 개가 심드렁히 코를 곯고 있네 텅 빈 놋그릇엔 햇빛만 마지못해 차 있고 먼 바람 소리는 풍경하고나 자처 울며 노는데 그런 거 아닐까 삶은 무주공산의 저 문턱을 번질나게 넘으며 부처 대신 개가 핥고 난 가난의 놋그릇이나 훔치어보는 것 그 속에,기울어가는 햇빛 몇 올로 갇히는 것
2024.04.12 김포신문 기고
김황흠 시인 / 엽채는 빗방울을 좋아해
약국에서 접대하는 공짜 커피 한 잔 빼 마시는데 유리문 밖으로 빗방울이 툭툭 떨어진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 틈에 끼여 손 우산 쓰고 가다가 멈췄다
좌판 벌여 놓고 어디를 갔는지 아까 본 할머니는 보이지 않고 쪽파, 대파, 시금치, 얼갈이, 상추 볕 좋은 날 밭에서 캐어 온 쑥이며 달래며 취나물 촐랑촐랑 비를 맞고 있다
비 맞으면 좋제, 낮 볕에 시든 것들 볼기에 살 짝짝 오르겠다
-김부회의 시가 있는 아침 – 김포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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