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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영자 시인 / 못의 시인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
허영자 시인 / 못의 시인

허영자 시인 / 못의 시인

 

​“김종철 시인!”

하고 부르면

박혔던 못이 뽑혀 올라오듯이

이 세상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돌아와서는

“까뜨린느 드누브!”하고

큰소리로 나를 놀리고는

호탕한 웃음소리

쩌렁쩌렁 울렸으면 좋겠다

​예수 그리스도는 목수의 아들

못 박혀 돌아가신 성인

세상의 아픈 못을 뽑으러 오셨던 분

​못을 노래한 못의 시인 그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돈독하고 신실한 신도

​저 세상 가서도 못통을 들고

​부지런히 부지런히

​못을 박고 못을 뽑으며

​다 못한 못노래를 부르고 있겠지

 

 


 

 

허영자 시인 / 바위

 

 

한 여인이

그 영혼을

송두리째 드린다 하면

 

한 여인이

그 살을

피를

내음을

송두리째 드린다 하면

 

아아,

그대의 고독은 풀릴 것가

 

차갑고 어둡고 말없는 얼굴

그대 마음을 풀 길 없는

크나큰 이 슬픔

 

울먹이며 떨며 머뭇대는

나의 사랑아!

 

 


 

 

허영자 시인 / 잠 못 이루는 밤

 

 

이슬 구르는 연잎 위에

조그만 새끼 청개구리

잠들어 있을까

 

겹겹 두른 배춧잎 속에

파아란 배추 애벌레

잠들어 있을까

 

야위어 앙상한 르완다의 어린이

허리 꼬부려 누더기 속에

잠들어 있을까

 

켜켜이 쌓이는 어둠

시름 깊은 층계 아래

아아

잠 못 이루는 이 캄캄한 밤

 

 


 

 

허영자 시인 / 어머니 말씀

 

 

고개 수그리고 걷는

겨울바람 속에

어머니 가만한 말씀 들려온다

 

“얘야 차 조심하거라”

 

갈 곳 몰라 비틀거리는

외로운 저녁답

어둠 속에 어머니 음성 들려온다

 

“얘야,마음 편한 것이

제일이다”

 

옛날 그 옛날엔

잔소리같이 들리던 말씀

옛날 그 옛날엔

쓸데없는 걱정같이 들리던 말씀

 

“녜!어머니

차 조심 하겠습니다

녜!어머니

욕심없이 마음 편히 살겠습니다.”

 

 


 

 

허영자 시인 / 아픈 손끼리

 

 

아픈 손이

아픈 손끼리 마주 잡는다

 

아픈 마음이

아픈 마음끼리 순히 겹친다

 

아픈 손이

아픈 손 곁에서 쉬고

 

아픈 마음이

아픈 마음 곁에서 낫는다

 

참말로 아픈 손

아픈 마음은

 

그래서 안 아픈 손이 되고

또 안 아픈 마음이 된다.

 

 


 

 

허영자 시인 / 찔레꽃

 

 

가시와 꽃이

위태롭게 나란히

 

적의와 관능이

부딪칠 듯 나란히

 

울음과 웃음을

한 가지에 머금은

 

모순의 향기

하얀 찔레꽃.

 

 


 

 

허영자 시인 / 투명에 대하여 4

 

 

유리창을 닦으니

세상이 환하다

 

안경을 닦아 쓰니

세상이 환하다

 

마음을 고쳐먹으니

세상이 환하다

 

너와 나

선 자리를 바꿔보니

세상이 환하다

 

-시집 『투명에 대하여』에서

 

 


 

허영자(許英子) 시인

1938년 경남 함양 출생, 숙명여대 문리대 국문과 졸업. 인하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 학위. 1962년 박목월 추천 현대문학 등단. 성신여대 인문대 국문과 교수. 현재는 명예교수. 1962년 《현대문학》에 〈도정연가〉,〈사모곡〉 등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 『투명에 대하여』, 『아름다움을 위하여』, 『마리아 막달라』, 『꽃 피는 날』, 『친전』 『가슴엔 듯 눈엔 듯』,『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 『그 어둠과 빛의 사랑』 등, 한국시인협회상, 월탄문학상, 민족문학상, 숙명문학상 수상. 한국시인협회장,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