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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율리 시인 / 라디오 소리 좀 줄일까요? 아욱국을 끓이자 많이 자랐구나 아욱을 몰라요 질문 없는 한해살인가요 시간의 길이를 계산하고 있어요 소금 한 주먹 넣고 바락바락 씻어라 보이지 않는 불순물이 많단다 보이는 것도 다 씻지 못하고 살아요 변명은 필요 없단다 푸른 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씻어라 오늘 길이는 나중 계산하고 그런데 일곱 살은 어디로 갔니 라디오 소리가 너무 커요 쌀뜨물을 받아라 잡내 제거에 도움이 된단다 아욱에 무슨 잡내가 있나요 잡내는 어디에나 있단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구별하기 힘들어요 3차원의 원근법은 무시해도 된다 얘야 멸치 대가리를 떼고 된장을 풀으렴 팔팔 끓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들이 있구나 자다 깬 아욱꽃의 시간도 있어요 한해살이에 집착하지 말아라 멸치가 떠오르는구나 꽃의 온도를 재는 꺾은선 그래프 같아요 아침도 없이 오는 연체이자 같구나 아욱을 쥐어뜯어 넣어라 미끈거려요 미끄러지겠어요 사춘기를 생각하니 부드러움에 집중해라 풋내 없이도 가라앉는 것들이 있구나 가을 아욱국이다 문 닫고 먹어라 가을까지 살았군요 너무 팔팔해서 걱정이다 넌 분수의 곱셈 없이도 가을은 온단다 숨어드는 잡내를 조심하거라 그런데 너는 몇 살이니 꽃이 작구나 저는 이제 열두 살이에요 소금은 언제나 제 자리에 있단다
-아르코 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작 중-
이신율리 시인 / 나방 어제는 나보다 작은 나방을 죽이고 오늘은 나보다 큰 나방을 죽이고 작은 것들은 커지고 작아서 너무 큰 것들은 붉은 달이 뜨는 밤 계수나무에 목매달 것들이 너무 많아 하나를 매달면 또 하나가 웃는 아무도 잠들지 않는 밤 겹겹 분가루를 날리면서 어둠의 바깥을 쏘아보는 계수나무 잎이 돋아 죽은 것들의 맥박 뛰는 소리가 들려 체감온도는 모르겠어 보호색이 없는 우울을 지나 밤을 다 써버린 색깔을 골라 붉은 달이 뜨는 밤 정지비행을 잊고 아무렇지 않게 휙, 북쪽을 치면 꿈 밖은 온통 나방의 세계 나방이 나방을 이해할 때까지 흰색이 돋을 때까지 흰색을 칠하면서 붉은 달을 무너뜨리면서 날개는 끝까지 젖지 않아 달빛은 저쪽이야 북쪽도 저쪽이야 이쪽엔 나방을 죽이는 방법만 살고 있어 나방을 고쳐 읽는 밤, 환생은 없어 무성한 행운을 빌어
이신율리 시인 / 그런데 건우가 몇 살인가요? 고양이 없는 골목을 그려요 검은 고양이 색으로 세 칸짜리 사다리와 딸기 망치는 검정 사인펜 바나나 씨앗을 품고 있는 흙은 흑색을 골라 검은 얼굴에 검은 넥타이 까만 축구공까지 나이키 어린이 디자이너가 그린 먹물 그림 아빠 운동화 멋지잖아요 검정보다 더 어두운 빨강을 떠올려요 이상하지만 그건 누나의 생각이죠 사생대회 상장 마음입니다 혼자 웃느라 잃어버린 자세는 24색에서 골라요 예리한 관찰력에서 태어난 십이월의 색 빛을 넘어 빛이 없는 빛까지 쫓아가도 미세 플라스틱과 미세 자폐의 관계는 잘 몰라요 풍선을 삼키거나 비닐봉지를 뜯는 동물들이 꿈속에서 내게 자일리톨 사탕을 던져요 내 얼굴은 네모 동그라미를 그려도 대답하지 않는 네모를 중얼거리면서 우린 아파도 심심하니까 그래도 정확하게 발차기하는 나를 보고 운동치료 덕분이라고 하지만 그건 눈사람의 뒤통수 이야기 먹물로 그린 나무 이파리들의 이야기 뿌리 없는 나무를 따라가 눈코 귀가 없는 나를 나무 그늘 속에 묻고 와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색을 지나 내일은 적당히 추울 거예요 떼쓰지 않는다고 쓰다듬는 머리에 내가 묻지 않는 대답을 그려요
이신율리 시인 / 소풍 뒷산 가는 길엔 불에 데지 않은 패랭이가 피고 있겠지 일찍 잠든 돌멩이를 발로 차지 않을 거야 사마귀 날개 같은 여기에서 폭설을 모르는 발등에 입을 맞추고 현관에 붙은 밴드가 어떻게 손을 내밀어 커다란 슬리퍼에서 뒤꿈치가 흘러내려 패랭이꽃 전설처럼 낭떠러지는 조심하고 눈 감아도 환하게 우리 집을 그렸어 없는 사람들은 평화롭게 얼어붙은 쪽에 대문 잠그고 웃는 사람들도 꽁꽁 묶어 다정하게 방부제를 먹은 김밥처럼 지워지기 전에 풋마늘을 먹어 주먹을 이겨야지 편의점에서 곱셈을 팔까 어떻게 초코파이 주렁주렁 펀치를 날리는 가로등을 지나 착지하기 전 오버로크 한 밤을 풀어야지 여덟 살을 잃어버린 연필에 침을 바르고 아프지 않은 바나나 우유를 마시면서 빙그레 돌림노래를 불러야지 구석구석 오늘 알림장에 적어도 되나요 바닥을 보여줘도 죽은 손들이 올라오는데 안티프라민 맑은 손을 잡고 한 움큼 약국으로 놀러 가요 처음부터 끝까지 소풍이었을까 봄가을 없이 단 한 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십자가 앞에 모은 손들이 소풍을 불러 일찍 잠든 돌멩이가 수북하게 쌓이는데
이신율리 시인 / 별사탕 자석다트게임 초록은 중요해 휴양림에 당첨된 것처럼 여덟 번 던져봐 몸을 뒤집는 나무 이파리를 향해 비행기 소나무 멀리뛰기 콩잎 방과 후 초록은 5점 여름과 겨울에 걸치면 안 돼 나이테는 인정해 주세요 아버지는 콩국수를 먹고 나왔습니다 2점 자꾸 불발이야 오늘은 기념일이 아니라서 어제 아닌가요 빛나는 꽝이네 그래도 선물은 쏟아져 인중 긁지 말고 집중하는 손끝에 비비탄을 심어봐 보디가드 3000 총은 날아갔습니다 화약으로 골랐어요 터지지 않고 번쩍거리네요 죽어가는 사과나무를 베어 버리고 싶은 날이에요 나는 쑥쑥 자라고 다트판은 멈추지 않고 유전자로 가위로 편집할까요 설탕물을 먹고 자라는 별사탕을 굴리면서 6일 동안 엄마를 키워요 오천 원을 모을 때까지 아버지도 총을 가져본 적 있나요 몇 번을 던져서 내가 태어났나요 몇 점짜리 나를 뽑았나요 나를 기다리는 선물은 잡아먹지 않는 물고기 같아요 자꾸 던져보세요 등 푸른 자세로 너무 가까이는 뜨거워요 엄마가 콩국수를 먹고 나왔습니다 오늘은 기념일 5점 쌍권총 포즈에 모자이크 부탁해요 혈압 높은 아버지도 함께던져요 -계간 『다층』 2020년 겨울호
이신율리 시인 / 영광 택시
발걸음을 세는 일은 맑거나 흐려지는 날씨 그걸 숫자로 바꾸는 일은 잘라버린 꼬리가 자라는 동안
뒤축이 닳은 미터기를 고친다
행진곡을 따라 떠났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미안해요 난 이제 지도가 없어요 어떤 꼬리들도 그렇다
미터기 속 아이 웃음소리가 살고 새로 난 길이 가라앉거나 떠오르지 않는 살림살이가 좌표도 없이 떠 있다 답은 0이 되거나 밥이 익는다
해나고 바람 불지 않아도 뒤축이 닳는 오늘 반숙 달걀이 첫눈 내리는 표정처럼 명랑할 수 있다면 돼지비계의 마술처럼 사월이 끓거나 씀바귀처럼 알약이 써도 되겠지 더 이상 소화할 것이 없을 때
빈 영수증에 얼굴을 덜어 적는다 빨간 신호에도 멈추지 않는 숫자는 자다가 그린 그림 같아 겹치는 색이 많을수록 정지 버튼을 눌러 공터마다 옮겨 피는 봉숭아가 된다
발길이 뜸한 열두 시 잘린 꼬리가 자라기 시작한다
이신율리 시인 / 화요일에도 별을 굽나요
물방울 자세 도라지꽃이 있는 힘을 다해 하늘을 터트리면 몸 안의 푸른 물고기가 뛰쳐나와요 손깍지를 끼고 속눈썹으로 부르는 노래는 글썽해지지 않아요 악보 없는 노래는 쓰면서 달고 너무 달아서 쓰다고 소태나무 아래 오래오래 서 있어요
꽃밭 귀퉁이에 도라지 타령 한 자락을 풀어놓았죠 그럴 때 살아 있는 노래가 마디마디 일어서 뒤꿈치가 바삭해지고요 가끔 헌혈 후 받은 영화표 한 장처럼 귀를 생략하기도 합니다만 집중하는 간격과 간격 사이에서 징이 울려요 뒤통수가 무성해지는 화요일은 십 년이 넘은 종합 선물 세트죠 잘못 그린 그림 속으로 물방울 같은 발을 내디디면 별을 굽는 보라의 나라에 닿을 수 있어요
노래는 일곱 번 바람 끝을 돌아온 새카만 풀씨였다죠 풀씨 저 혼자 손톱 밑이 까매질 때까지 꽃눈을 만들고요 살굿빛 목젖을 달싹거려 보는 거죠 바람 끝에 털어놓은 꽃가루가 흩어졌다 다시 모여요 눈 감은 시간만큼 고인 어둠이 어디서부터 훌쩍, 남물이 들까요 나는 얼마나 푸른 길이 될까요
-『아토포스』 2022년 겨울 창간호
이신율리 시인 / 토마토 모자
토마토가 달린다 짭짤이 토마토가 달린다 빨강은 멈추지 않고 졸음 쉼터를 지나친다 시 속 110km가 고속도로를 쫓아온다 추월하는 울트라 토마토, 주차장은 불어 터진 스파게티 같아 화장실은 멀고 호두과자 줄은 너무 길어
출렁거리는 휴게소에서 하모니카를 분다 화분 속에서 토마토가 익는 사이 낮달 속으로 귀가 사라진다 토마토 모자를 벗는다
노래할 때마다 하모니카를 불어주던 외삼촌은 어디 있을까 늘어진 테이프에서 트로트를 걸치고 사라진 외삼촌이 나온다
모자를 쓴다 잘 익은 토마토 모자를 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토마토 냄새를 알아가는 거라고, 하모니카 소리가 강물을 타고 들려왔다
강물로 박자를 맞추던 외삼촌이 하모니카를 불면서 모자에서 흘러나왔다.
짭짤이 토마토가 달린다 외삼촌이 달린다 길이 자꾸 넓어진다
-계간 《다층》 2020년 겨울호 발표 <젊은 시인 7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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