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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희 시인 / 토르소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
김지희 시인 / 토르소

김지희 시인 / 토르소

 

 

얼굴도, 가슴도 없이

몸통뿐인 모습이 민망하다

 

유럽 여행길에서 만난 이방인 친구

사지 다 잘리고

머리마저 날아간 불구의 토르소가

루브르 박물관, 고대 문명으로 가는 길 지키고 있다

 

얼굴이, 가슴이 잘려나간 그의 언어는 어디 있나

 

어둠을 뒤집어쓴 저녁,

묘비처럼 외롭게 웅크리고 있는 글자들

 

밥벌이도 할 수 없고

가슴에 꽂혀 있는 갈고리도

빼내줄 수 없다

세상 어둠의 빗장도 열지 못한다

 

캄캄하고 고요만 깊은데...

 

홀로 새벽을 밟고 있는

저 영혼의 썩지 않은

곧은 칼 한 자루!!

 

 


 

 

김지희 시인 / 비꽃, 가파도

 

 

보석은 뒤집어 놓아도 보석이라지

하늘은 어두워져도 갈 길은 밝았다지

주전자 찻물은 꿇고 뜨건 물에 몸 풀었다지

섬이 섬인 까닭은 그대가 그 섬에 있기 때문이라지

그래도 삶이 익숙해지지 않는 건

당신이 앙가슴에 끼었기 때문이라지

한밤중에도 햇살에 말갛게 씻긴 새소리 들려온다지

당신을 취미로 수집한 지 벌써 수천 년

몹시 가 닿고 싶어 환하게 열린 물길 따라

파리한 산수국의 스템으로 거닐었다지

내리는 빗소리에 발자국 잠겨버렸다지

그곳에는 만난 적 없는 나무가 잘 자라고 있다지

만나지 못한 당신 있어

그 섬, 비꽃이 꽃비로 내리고 있다지

 

-계간 『다층』2019년 여름호에서

 

 


 

 

김지희 시인 / 등(藤)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

 

 

무녀도 지나 선유도까지 가려한다

선유도 명사십리 앞바다가 끌어당기지 않아도

생은 이렇게 끌려가고

주머니 속에서는

바다가 우우우 앓는 소리를 낸다

바닷바람이 긴 밤 하얗게 깨어 있게 한다

새의 깃털되어 지나가는 파도는 지난 봄

내가 버린 상처 같은데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선유도 갈대와 이별한 바다처럼

때로는 사랑보다 이별이 먼저 오고

더러는 기쁨보다 아픔이 먼저 온다

바닷가 물들이는 석양 아래

무녀도(巫女島) 가는 길

무녀는 없다 너를 본 적 없으니 만난 사람도 없다

누가 왔다 갔는지도 모른 채

아직 남아 있는 길에서

우리들은 저마다 헤어지고, 만난 사람 없으니

다시는 헤어지지 않는다

 

-시집, 토르소 (2015, 시와문화) 중에서

 

 


 

 

김지희 시인 / 시밭

 

 

뙤약볕 화단에는

시집이 가득 놓여있다

예쁘게 쓰여있는 글귀들이

빽빽하게 있다

언제 저 글들을 다 읽어 내려가지

 

가지에 영근 산수화 그림

개울에 흐르는 수채화까지도

이쁜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텃밭에 심은 농작물도

열심히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책갈피 속에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있고 구름 바람 벌 나비도

상념으로 젖어 드는 그리움까지도

멋진 글들로 쓰여 페이지 페이지

넘어간다

 

몇 권의 책을 읽어야 할지

 

 


 

 

김지희 시인 / 시인이라는 이름

 

 

보슬비가 내리는 날에 비를

맞아본다

바람이 불고 자욱한 안개 속을

헤매본다.

 

추억이 떠오를까 잡아본다

피어오르는 꽃망울이 이뻐

바라보는 내 모습도

안개비 속으로 걸어가는 내 모습도

그리움은 잡히지 않는다

 

예뻤던 시절처럼 조용히

내 안을 파고드는 맑은 새소리

맑게 갠 하늘

바라보는 뜨거운 햇살도

나에게는 그 자체가

시어처럼 느껴진다

하루하루가 센티해진 시인의

걸음이 되어본다.

 

 


 

 

김지희 시인 / 촛불

 

 

중세 불빛처럼 조용한 식탁에서 저녁을 먹고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 하는 나와

화초에 물을 주고 있는 남편과

무관심도 관심인 듯 닫혀 있는

아이의 방문 사이에는 말이 없다

저녁 노을이 많다

그래도

서로를 태운 빛으로 별이 되어 어둡지 않다

 

-시집 『토르소』 2015. 시와문화

 

 


 

 

김지희 시인 / 즐거운 장례식

 

 

생전에 준비해둔 묫자리 속으로

편안히 눕는 작은 아버지

길게 사각으로 파 놓은 땅이

관의 네모서리를 앉혀줄 때

긴 잠이 잠시 덜컹거린다

관을 들어 올려

새소릴 보료처럼 깔고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죽음

새벽이슬이 말갛게 씻어 놓은 흙들

그 사이로 들어가고 壽衣 위에

한 겹 더 나무그늘 옷을 걸치고

그 위에 햇살이불 끌어당겨 눕는 당신

이제 막 새 세상의 유쾌한 명찰을 달고

癌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섭다며

둘러선 사람들 어깨를 토닥거린다

향 같은 생전이 다시 주검을 덮을 때

조카들의 두런대는 추억 사이로

국화꽃 향기 환하게 건너온다

 

-200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김지희 시인

경북 성주 출생. 2006년 《사람의문학》으로 등단. 2014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토르소』. 문학에세이집 『사랑과 자유의 시혼』. 계간 <시와 문화>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