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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희 시인 / 토르소
얼굴도, 가슴도 없이 몸통뿐인 모습이 민망하다
유럽 여행길에서 만난 이방인 친구 사지 다 잘리고 머리마저 날아간 불구의 토르소가 루브르 박물관, 고대 문명으로 가는 길 지키고 있다
얼굴이, 가슴이 잘려나간 그의 언어는 어디 있나
어둠을 뒤집어쓴 저녁, 묘비처럼 외롭게 웅크리고 있는 글자들
밥벌이도 할 수 없고 가슴에 꽂혀 있는 갈고리도 빼내줄 수 없다 세상 어둠의 빗장도 열지 못한다
캄캄하고 고요만 깊은데...
홀로 새벽을 밟고 있는 저 영혼의 썩지 않은 곧은 칼 한 자루!!
김지희 시인 / 비꽃, 가파도
보석은 뒤집어 놓아도 보석이라지 하늘은 어두워져도 갈 길은 밝았다지 주전자 찻물은 꿇고 뜨건 물에 몸 풀었다지 섬이 섬인 까닭은 그대가 그 섬에 있기 때문이라지 그래도 삶이 익숙해지지 않는 건 당신이 앙가슴에 끼었기 때문이라지 한밤중에도 햇살에 말갛게 씻긴 새소리 들려온다지 당신을 취미로 수집한 지 벌써 수천 년 몹시 가 닿고 싶어 환하게 열린 물길 따라 파리한 산수국의 스템으로 거닐었다지 내리는 빗소리에 발자국 잠겨버렸다지 그곳에는 만난 적 없는 나무가 잘 자라고 있다지 만나지 못한 당신 있어 그 섬, 비꽃이 꽃비로 내리고 있다지
-계간 『다층』2019년 여름호에서
김지희 시인 / 등(藤)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
무녀도 지나 선유도까지 가려한다 선유도 명사십리 앞바다가 끌어당기지 않아도 생은 이렇게 끌려가고 주머니 속에서는 바다가 우우우 앓는 소리를 낸다 바닷바람이 긴 밤 하얗게 깨어 있게 한다 새의 깃털되어 지나가는 파도는 지난 봄 내가 버린 상처 같은데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선유도 갈대와 이별한 바다처럼 때로는 사랑보다 이별이 먼저 오고 더러는 기쁨보다 아픔이 먼저 온다 바닷가 물들이는 석양 아래 무녀도(巫女島) 가는 길 무녀는 없다 너를 본 적 없으니 만난 사람도 없다 누가 왔다 갔는지도 모른 채 아직 남아 있는 길에서 우리들은 저마다 헤어지고, 만난 사람 없으니 다시는 헤어지지 않는다
-시집, 토르소 (2015, 시와문화) 중에서
김지희 시인 / 시밭
뙤약볕 화단에는 시집이 가득 놓여있다 예쁘게 쓰여있는 글귀들이 빽빽하게 있다 언제 저 글들을 다 읽어 내려가지
가지에 영근 산수화 그림 개울에 흐르는 수채화까지도 이쁜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텃밭에 심은 농작물도 열심히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책갈피 속에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있고 구름 바람 벌 나비도 상념으로 젖어 드는 그리움까지도 멋진 글들로 쓰여 페이지 페이지 넘어간다
몇 권의 책을 읽어야 할지
김지희 시인 / 시인이라는 이름
보슬비가 내리는 날에 비를 맞아본다 바람이 불고 자욱한 안개 속을 헤매본다.
추억이 떠오를까 잡아본다 피어오르는 꽃망울이 이뻐 바라보는 내 모습도 안개비 속으로 걸어가는 내 모습도 그리움은 잡히지 않는다
예뻤던 시절처럼 조용히 내 안을 파고드는 맑은 새소리 맑게 갠 하늘 바라보는 뜨거운 햇살도 나에게는 그 자체가 시어처럼 느껴진다 하루하루가 센티해진 시인의 걸음이 되어본다.
김지희 시인 / 촛불
중세 불빛처럼 조용한 식탁에서 저녁을 먹고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 하는 나와 화초에 물을 주고 있는 남편과 무관심도 관심인 듯 닫혀 있는 아이의 방문 사이에는 말이 없다 저녁 노을이 많다 그래도 서로를 태운 빛으로 별이 되어 어둡지 않다
-시집 『토르소』 2015. 시와문화
김지희 시인 / 즐거운 장례식
생전에 준비해둔 묫자리 속으로 편안히 눕는 작은 아버지 길게 사각으로 파 놓은 땅이 관의 네모서리를 앉혀줄 때 긴 잠이 잠시 덜컹거린다 관을 들어 올려 새소릴 보료처럼 깔고서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죽음 새벽이슬이 말갛게 씻어 놓은 흙들 그 사이로 들어가고 壽衣 위에 한 겹 더 나무그늘 옷을 걸치고 그 위에 햇살이불 끌어당겨 눕는 당신 이제 막 새 세상의 유쾌한 명찰을 달고 癌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섭다며 둘러선 사람들 어깨를 토닥거린다 향 같은 생전이 다시 주검을 덮을 때 조카들의 두런대는 추억 사이로 국화꽃 향기 환하게 건너온다
-200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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