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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산 시인 / 드네프르강가의 노래
언어가 다른 우리들은 시어(詩語)를 산란한다 아직 자라지 못한 문장들이 수면에 떠다닌다
반쯤 벗은 남자와 반쯤 가린 여자들이 강가 숲속에서 배를 부딪치며 리듬을 맞춘다 그들은 언어가 필요하지 않다
씨니피앙이 흐르고 흘러서 깊어진 강물 우리들의 음성만 남고 문장은 라르고로 헤엄친다
여름이, 더위가, 우리들이 드네프르강을 읽는다 익숙하지 못한 언어들이 보드카를 마시고 구름 속에서는 물고기들이 깔깔거리며 떠다닌다
씨니피에를 골라 서로의 지느러미에 단다 뜨거운 태양을 튕기며 폭죽처럼 터지는 언어의 꽃들
영혼을 나눈 문장들이 물결을 연주한다, 알레그로로 피부색과 국경을 뛰어넘은 음악이 지구를 돌고 돌아 드네프르강에서 한강으로,
-계간《포엠포엠》2018년 가을호
박미산 시인 / 계영배(戒盈杯)*
감히 신의 세계를 담아보겠다고 셔터를 눌러대다가 이끼에 미끄러졌다 발목이 퉁퉁 부었다 푼힐 전망대부터 붉은 판초를 둘러쓰고 말을 탄 채 빗속을 걸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다울라기리 안나푸르나 마차푸차레 히운출리가 등 뒤에서 채찍질한다
경사진 비탈길이다 말은 끈기 있게 길을 더듬으며 천천히 내려간다 몸을 뒤로 젖혀 말과 거리를 두는 순간 오르막길을 전력 질주로 뛰어가는 말, 난 말 등에 붙는다. 길옆 나무들이 휙휙 지나간다. 방심과 조바심의 순간들
흙탕물이 길을 삼킬 듯이 달려든다 팔월의 나무가 쓰러지며 길을 막는다 뿌리의 신음, 몸속 깊이 숨어 있던 기이한 소리가 아우성친다. 상처 입은 물 위에서 소용돌이치는 계곡
앞만 보고 벼랑과 진창을 밟아갔던 어제, 오늘은 설산을 넘나들며 천천히 돌아간다 원숭이가 바나나를 낚아채고 거머리가 몸속을 파고든다 만병초, 프리물라는 뭉게구름 속에서 왔다 갔다 흔들거린다 낯선 꿈으로 가득 찬 롯지에서 조장을 막 끝낸 창백한 설산에 계영배를 올린다
※계영배(戒盈杯): 이 술잔은 잔 안에 술이 70% 이상 차면 술이 없어져 버린다. 이는 가득 차는 것, 즉 욕심을 경계하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월간 《현대시≫ 2022년 7월호ㅡ
박미산 시인 / 난해한 세차
칼끝 같은 물살이 촘촘하게 내 몸에 꽂힌다 쏟아지는 물글씨를 읽는다 오래 여행 끝에 젖어드는 추위, 양철 두드리는 비명을 삼키고 금 가고 있는 얼굴을 바라본다 너무 앓아 곧 부서질 듯한 늑골 위로 꼬리에 꼬리를 문 매연의 시간이 흘러내리고, 메마른 어둠이 내 등을 통과하는 동안 매캐한 소문이 지나간다 물빛과 불빛 사이 바람을 맞으며 멍하니 서 있는 나는 어둠도 시간도 바람도 지나치게 익숙했다 불빛 속에 상처 입은 메타포의 환상을, 어두운 물빛 속에서 누덕누덕 기운 비유의 흔적을 본다
더 낡기 위해 더 늙기 위해
환하게 전조등을 켠다
- 월간 《현대시≫ 2022년 7월호, '신작특집'에서
박미산 시인 / 비트코인
낯선 별에서 더 낯선 별을 통과한 나는 엄마의 믿음이 가득 찬 탯줄을 끊는다 이제 가치와 신뢰의 세계는 끝이 났다
황금빛으로 물드는 시간이 오고 있다 백 년을 반쯤 뜯어먹은 나는 무릎을 감싸 안고 창문을 바라본다 당신의 깨진 믿음이 내 발밑에 가득하다
환상을 그려 넣을 줄 아는 아이는 창문을 깨지 않고 통과한다 아이의 탯줄을 꽉 움켜쥔 내가 끌려간다
경전도 교리도 없는 바람이 분다
엄마, 여기는 물의 숲이야 저긴 구름의 바다고 저 멀리는 눈보라의 정거장이야
얘야, 너의 숲 너의 바다 너의 정거장은 언제 사라질지 몰라
엄마의 별빛을 무참히 찔렀던 내가 아이의 꿈을 꿀꺽 삼키려던 내가
바람의 신도들에게 밀려 떨어진다
박미산 시인 / 용동 큰 우물
아이들이 물에 잠겨 있다 두레박을 내린다 손수건을 가슴에 단 갑례, 동순이가 올라온다 또 한 두레박을 퍼 올린다 덕인이, 종찬이, 천기가 두레박에서 쏟아진다 술 한 잔 마실 때마다 물안개 같은 아이들이 큰 우물을 돌아 배다리로 간다 헌책방을 지나 창영국민학교 운동장 햇살이 머물던 자리에 우르르 몰려드는 아이들 좌충우돌 파문을 일으키며 심장을 두드린다 조개탄이 이글이글 타고 산더미 같은 도시락이 쓰러지며 사십삼 년이 왁자하게 부서진다 빛보다 빠르게 고무줄 끊고 도망가던 순교 달리기 잘하던 종재는 저 세상을 급하게 달려갔다 하는데 우물 한 귀퉁이에서 낯가리던 물결과 물결이 돌고 돌아 뒤섞인다 우리는 두레박줄을 밤새 당긴다
박미산 시인 / 염색 우린 검은 바닥에서 함께 뒹굴곤 했습니다 그가 방에서 걸어 나와 내 무릎 앞에 앉습니다 짧은 커트 머리, 그인 줄 알았는데 그가 아닌 내가 젖은 머리카락을 빗질하고 있습니다 뇌 회로가 끊어지고 엉킨 그는 본능만 남았습니다 당당하고 기품 있게 번역하던 그 회로가 희미하게 이어지면 면도날 같은 말로 나를 쓰윽 긋고 때론 해맑은 아이처럼 내 품에 안겨 엄마에게 데려다 달라던 그 매일매일이 전쟁이었던 그의 눈빛 속으로 내가 들어가고 그는 내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습니다 깨진 삶이 은빛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져 우리는 앞이 보이지 않는 까만 가발의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그의 방을 엽니다 훅 끼치며 살아나는 그의 냄새 죽어버린 나의 젊음이 빠르게 거울 속을 스쳐 지나갑니다 산화제와 염모제가 뒤섞여 변해버린 그와 나처럼,
박미산 시인 / 복사뼈에서도 하얀 눈이 내렸다 겨울이 무릎까지 깊어진 크리스마스 전날이었다 축구공과 소년들이 공중에서 산타처럼 몸을 던지며 내려왔다 소년들은 썰매를 타고도 공을 차며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반복했다 점점 빨라졌다 그들의 발 아래에선 캐럴과 함께 공이 춤을 추었다 땀으로 번진 등짝과 소년들의 머리에선 풀풀 김이 오르고 오르막길은 그들의 운동장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골키퍼가 된 나는 머리 어깨 팔뚝 다리에 눈송이를 꽂고 골대 앞에서 기다렸다 언제 내 앞으로 올지 모르는 공, 푸른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볼, 매서운 바람을 가르는 볼, 한 소년의 발이 공중에 뜨자마자 별이 반짝였다 그 별이 눈앞으로 날아왔다 별이 번쩍 공은 저만치 굴러가고 숨어있던 블랙아이스가 한쪽 발목을 잡아챘다 생솔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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