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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호 시인 / 잎과 잎 사잇길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것이 나무의 뜻이 아니어서 거리는 추상이다
잎과 잎 사이는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므로 추상은 고유하다
잎과 잎 사이는 울돌목의 파도가 지나가는 해협, 울음이 추상을 토악질한다
아무리 게워도 죽음은 추상이다
한 사람이 떠난 발자국과 발자국 사이가 잎과 잎 사이처럼 갈 수 없는 거리여서 거리는 죽음에 고유하다
잎과 잎 사이 조류가 거세게 흘러 우는 소리로 들렸다는 울돌목 그해협을 가르며 새 한 마리 날아오른다
잎과 잎이 추상으로 떨어진다
천수호 시인 / 다이어리
그와 함께 붓던 적금을 어쩌나 해외여행 가자고 했던 저 거액을 어쩌나 배낭 위에 태워서 가자 할 수도 없고 호주머니에 넣어서 가자 할 수도 없게 용도는 잃고 액수만 커져 가는 저 날짜들
키 큰 소나무 뿌리로만 향하는 그 마음을 잘라서 내 가슴 골짜기에 이식할 수도 없게 그는 이미 내 사람이 아니고
빗물에 한 눈금씩 녹아들어가는 그 몸을 어떻게 뭉쳐서 다시 업고 가나
그의 명의를 가진 적금 통장 찾기에도, 계속 붓기에도, 어정쩡해진 통장 키 큰 소나무 앞에 통장을 펼쳐놓고 절을 한다 이 돈 좀 가져가소 제발 좀 가져가소
그는 이미 가고 없고 숫자는 점점 불어만 간다 나는 갈 곳도 없이 머무를 계획도 없이 또박또박 옮겨 적고 있다 내가 녹은 뒤에도 쌓여갈 그 날짜들
천수호 시인 / 나의 모든 것과 그의 어떤 것
모든 것과 어떤 것을 담고 있는 강물이 흐른다 어떤 것은 모든 것을 비켜간다 모든 것은 어떤 것을 데리고 흐른다 강물 위에 어떤 것이 강물 속의 모든 것을 들여다보고 있다 도무지 들키지 않는 모든 것의 어떤 것 저 속으로 내가 흘러왔다고 우기고 싶어졌다. 나는 어떤 것을 데리고 그 모든 것을 피해왔을까 강물이 답해 줄 것 같지 않아 강물 위에 내 모든 것을 비춰본다 내 어떤 것이 강물의 모든 것에 겹쳐진다 나의 모든 것이 강물의 모든 것에 겹쳐져도 나의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강물의 어떤 것은 소리를 내고 강물의 모든 것은 어떤 것의 소리 뒤에 숨는다 나는 함께 흐른다고 생각했는데 강의 어떤 것이 나의 모든 것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강물에는 톱니바퀴가 없다 맞물리는 것도 어긋나는 것도 없다 그렇게 한 시절이 가고 있다 간혹 어떤 것이 찾아와 나를 우겨도 나는 도무지 어떤 것의 모든 것이 될 수 없다
천수호 시인 / 불탄나무
1. 숲이 타고 있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끝부터 재가되고 있었지만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무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슬픈 냄새를 가졌구나 말할 수 없는 입을 가졌구나 꿈은 거기서 멈추었다 전둥이 바알갛게 짓누르는 밤이었다 가연성의 몸을 훑어보며 이미 내가 절반은 죽은 나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래도 나무이길 잘했다발은 숨길 수 있으니까
물을 뒤집어쓴 나무지만 꿈 밖은 정전이라 더욱 환하게 타오르고 뜨거움도 차가움도 아닌 나는 비로소 슬픈 온도를 가졌다 꽃을 불로 흔들었으니 어지럽겠구나 위로의 말로 어디를 찔러도 바이러스는 검출되지 않았다 나무라는 것이 기적인 날이어서 멈춘 꿈은 거기에서 다시 이어졌다
2. 이미 불탄 나무였다 새파란 풀들이 산을 뒤덮어 한껏 부풀려진 능선에 불탄 나무로 서 있었다 얼굴이며 목소리며 손짓이 다 녹으면 그냥 불탄 나무가 되는 것이었다 불을 삼킨 목이 길어져 검은 유리병이 된다 해도 잎도 꽃도 없이 버티겠다던 말을 언젠가 한 적 있었던가 기억의 재도 저렇게 뼈를 이룰 수 있어서 숯검정 빛깔로 오래 나무처럼 서 있었다
새가 열매를 물어가던 시절의 구름이 나무의 뒷배경으로 머무를 동안 재의 걸음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빠져 들어갔다 불길이 휩쓴 곳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릴 게 없었다 나무의 뼈를 헤아리며 풀잎이 파르르 떠는 동안에도 떨지 않는 죽은 나무들 죽은 세계의 고요는 문득 깨지는 것이어서 누구의 언니들인지 그 검은 숲에서 새들이 왁자지껄 웃으며 날아올랐다
-계간 《시사사≫ 2022년 가을호에서-
천수호 시인 / 병을 나눠 먹는 순두부
함께 순두부를 먹는 날이었다 순한 것이 우리를 수그리게 했고 뜨거운 것이 우리를 망설이게 했다 식당에는 순두부와 아무 관계가 없는 청국장 냄새가 진동을 하고 냄새까지 순해진 뚝배기를 앞에 놓고 둘은 숟가락을 넣었다 뺐다 했다 폐질환을 나눌까요 간질환을 나눌까요 가능한 많은 병을 나누고 싶어요 그렇게 다정해도 우리는 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고 병명도 주고받지 못했다 주소는 달랐지만 통증을 나누기엔 적절한 사이 몇 개의 병을 예약하고 우리는 좀더 정중히 순두부를 퍼먹었다 뚝배기가 받는 절은 어떤 기원처럼 병을 잘 스미게 했다
-시집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문학동네. 2020
천수호 시인 / 섬망譫妄
아무도 없을 때 다녀간다 발자국을 훔치고 밥그릇을 말리고 머리카락을 쓸어서 땅 속에 묻는다 그럼 완전한 유령이 되나? 책갈피에 입김을 불어 넣는다 책을 열면 태풍이 불지도 모르기에 책꽂이 구석에 숨겨놓는다 나는 유령이니까 책을 읽을 필요도 없다 숨어있는 것이 더 이상 궁금하지 않으니까 숨바꼭질도 하지 않는다 누가 오는 소리가 난다 나는 발자국소리를 죽인다 나는 유령이니까 쉬운 것이 많다 마른 꽃잎이 떨어진다 유령의 짓거리를 아는 유일한 꽃잎이어서 더 이상 꽃이 두렵지 않다 냄새는 다 어디로 불어넣지? 내가 걱정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그건 의심에서 끝나는 거니까 대부분 보이는 것만 믿는 습관, 내가 유령이어서 믿는 구석이 더 많아졌다 구석은 나를 완벽하게 숨겨주니까 주먹을 쥔다 해도 피하지 않는다 맞는 유령은 얼마나 슬플까 생각하다 밖이 훤해지니 더 이상 내가 유령일 필요가 없어졌다 머리를 빗고 밥그릇을 씻고 신발을 찾는다 나의 신발은 다 어디로 갔나 빌릴 수 없는 것들만 사방에 가득 쌓여있다
천수호 시인 / 아주 작은 점의 세상
지금 나는 아주 작은 점을 지나고 있다
작은 섬을 지나가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그 점은 빗물에 불어서 번지고 있다
뺨을 다 가리고도 남는 손수건을 꺼내 왼쪽 뺨이 비친 차창을 긁어보는 데 동전이 긁고 지나간 즉석복권처럼 상금도 상품도 다 놓친 쭉정이 은박지 가루처럼 쓸모도 없이 차창에 동전 두께만한 금이 긁혔다
그 작은 금이 나를 지나가고 있다
점이 시야를 뒤덮고 있기에 하마터면 그것이 차창에 찍힌 얼룩이라는 것을 잊을 뻔해서 내가 점이라는 것도 깜빡할 뻔해서 컴컴한 점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 아가. 어머니. 부르며 가까운 이들이 여기에 있었구나 생각하고
그 깊은 굴속으로 먼 산 줄기가 사각거리며 먹혀들어가고
빌딩 하나가 통째로 쏠려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참 대단한 얼룩이야 이렇게 말하고 말았지만 이런 찬사는 사실 점의 세계를 허공에 있게 한 저 유리를 잊게 하는 말이었다 폰에도 작은 유리의 창이 있어 새 창을 열면 읽다가 만 기사가 다시 뜬다
죽은 척 한 우크라이나 소녀가 벌떡 일어나 인터뷰하는 장면 부모가 총살당한 현장에서 피얼룩이 숨겨준 목숨 점처럼 숨겨졌다가 커지는 이야기들 점이 벗는 허물은 차창을 파닥거리는 성충으로 만들어 느티나무를 벗고 집채를 벗고 먼 산까지 벗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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