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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엽 시인 / 모래톱
몇만 년 전 바다가 삼켰던 험준한 산맥
한 입씩 한 입씩 물어다가 모래위에 내밷는다
장이엽 시인 / 눈부신 산란
닭장 실은 차가 지나간다 깃털이 날리고 냄새가 고약했다 털 빠진 모가지 위로 희번덕대는 붉은 눈알들이 허공으로 끌려가는데 층층층 높이도 쌓아올린 쇠창살 사이 구석 군데군데에 가만히 모셔 놓은 하얀 알들 눈부신 산란이다 죽음보다 무서운 속삭임이다 애틋하기도 하여라 웅크려 앉아 기어이 알을 품고 있는 엄마 닭도 보였다
장이엽 시인 / 계란판의 곡선이 겹치는 동안
트럭 위에 계란판을 쌓고 있는 남자 호잇~~짜 후잇~~짜 추임새를 넣어 가며 흔들 산들 리듬을 타고 있다 아슬아슬 높아지는 탑에 음표를 걸어 주는 저 흥겨운 몸짓, 멀뚱히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계란판 쌓는 데도 수가 있어요 곡선허고 곡선이 만날라도 리듬이 필요하당 게요 신명은 없고 신중만 있으면 알이 다 깨져 버리지라
야무진 입매로 지나가던 곡선 두 줄이 활짝 열린다 신념이 신명을 받아들이지 못해 뻣뻣하게 굳어 가던 나 오래된 철심 하나 뽑아내고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장이엽 시인 / 생각 접기
나는 내 감정을 오려낼 줄 몰라 생각을 줄이면 단순해질 텐데 종이를 접고 오려서 무늬를 만들다가 알록달록한 내 머릿속도 반으로 접고 눌러 가위로 오려 내고 싶어진다 토닥토닥 만작만지작거리거든 날개활짝 편 나비 한 마리 나왔으면 풀칠해서 벽에 붙여놓거나 끈을 묶어 천장에 매달아놓고는 생각 없이 누워서 바라봤으면 나 어찌할 줄 몰라 꽃 속으로 들어갈 줄을 몰라
장이엽 시인 / 짐은 안 나고 뜨겁기만 한 압력솥에게 당부함
짐은 안 나고 뜨겁기만 한 압력솥은 어린 나를 빗댄 엄마의 표현이었다
이웃에서 가져온 음식은 단박에 알아채고 제 숟가락 아니면 밥을 안 먹고 젓갈이 들어간 김치는 입에 대지도 않아서 김장김치 한 독을 따로 버무르기도 했던 밥상머리에서 부터 까탈을 부렸던 나는 말뚝을 갉아대며 날 뛰었던 뿔 달린 염소
물려 입어야 하는 옷가지며 끼어들 수 없는 오빠 언니들의 사생활 횟가루가 묻어 있는 아버지의 작업복 바지 막걸리 냄새가 베여 있는 연장 가방 품앗이에 바쁜 엄마 그걸 빤히 들여다보았던 내 빨간 눈
임신 사실조차 모르고 죽을병에 걸렸다고 요양하다 낳은 네 번째 딸이 뭐 그리 대수로웠으려고, 생각하며 나는 나를 너무 멀리 떼어놓았다
만약 아무 숟가락으로 밥을 먹고 아무 김치나 잘 먹는 아이였다면 빨간 눈이 없었다면 뿔을 잘라버렸다면 나는 지금과 좀 다른 나로 살 수 있었을까
장이엽 시인 / 흉내 -고민
가슴애피*가 있어 그런다며 술 마실 줄 모르는 엄마가 잔을 들었고 마룻바닥에 쓰러졌다 반절도 비워지지 않은 소주병이 덩그마니 평상 끝을 지키는데 울 줄도 모르던 엄마라서 통곡 대신 깊은 잠에 빠졌던가 흔들어 깨우다가 내가 그만 엉엉 소리 내서 울었던가 해 질 녘에 엄마는 깨어났다 내가 가슴애피가 있어서 그런다
갈대를 꺾어 만든 빗자루를 들고 구구단이 적힌 책받침을 들고 방이나 훔쳐내며 창문이나 열어 놓으며 죽은 엄마가 살아난 것만 같아서 제 가슴 쓸어내리기 급급했던 계집애는 그때 나이 아홉 살이었던가
사공의 뱃노래를 한 소절씩 나눠 부르며 새치를 골라내던 막둥이가 반백 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된 엄마의 가슴애피 그래 그래서 그랬구나, 우리 엄마
이제는 귀 기울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손 꼭 잡아주고 싶은데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을 텐데 그 엄마 먼 길 떠나고 없다
* '가슴앓이'의 전라도 방언
장이엽 시인 / 그 꽃, 능소화
전봇대에 매달린 현수막 숭숭 뚫린 구멍으로 조각하늘 들어오고 바람이 가뿐하게 빠져나갈 때 태양의 남중고도는 최고점까지 올라 수직선을 내려 그으며 달구어진 아스팔트 위 늘어선 자동차 행렬 사이로 기어이 아지랑이를 피워 올렸다
청하다리 건너 왼쪽 도로 옆 김제슈퍼 마당 바지랑대 밀어 올린 긴 외줄에는 아가미 꿰어 걸쳐 널은 망둥어의 열병식이 한창이다 아가미와 아가미가 이어지고 다시 꼬리를 물고 아가미가 이어지고 망둥어와 망둥어가 물컹한 살을 비벼 비린내를 흘리면 공처럼 굴러가 처마기슭 어딘가에 처박혀있을 배고픈 고양이의 앙큼한 눈빛과 손잡고 뱅뱅 어슬렁거리는 햇발들
속에서 조용한 오후를 흔든다
메타세콰이어 잔가지 위에 헝클어진 매무새로 거침없이 휘어 감는 무법자 주홍빛 꽃 등 점점이 내걸고 빈 허공으로 파르르 넝쿨손을 뻗치며 나무보다 높은 꿈을 키우는 그 꽃, 능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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