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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 시인 / 금강경 이야기
금강경 본다
우주 한 구멍에서 내가 나왔다는 거. 내 발이 무량대수요 내 얼굴이 천 개요 내 손이 천 다발이란 거. 휘저어 닿으면 우주 속살까지 다 만지고 주무르고 우주 심장에 가 닿는다는 거. 그러니까 내가
천 마디 천 생각도 다 한 구멍에서 나왔다는 거. 더러운 거, 무서운 거, 아름다운 거, 괴로운 거, 사랑스러운 거, 증오스러운 거, 다 한 구멍에서 나왔다는 거.
천지 우레 치는 장엄한 큰 시도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미미한 작은 시도 다 한 구멍에서 나왔다는 거. 저 풀도 저 물고기도 나도 한 구멍에서 나왔다는 거.
저 보이지 않는, 우주 한 구멍이 내가 오고 갈 구멍이란 거.
금강경 큰 구멍을 나 통과한다.
신지혜 시인 / 대청소
법정스님이 입적하기 전 한 일은 아마 대청소였을 것이다 한 목숨 받아 이 지상에 왔으면 시간 경영 잘해야지 쓸데없는 일, 남의 집 숟가락이 몇 개이며 남의 농장에 양과 소가 몇 마리인 것이나 헤아려서야 쓰겠느냐 시간탕진으로 소일하고 남은 시간 폐지 쓰듯 펑펑 써버렸으며 죽어 이름 몇 자 남기자고 부질없이 명예나 탐하고 뭘 좀 안다고 신변잡기 끄적거려 절 받으며 껍죽거렸으니, 어리석다 어리석다 어리석다 탄식했을 것이다 서점가에 발 푹푹 빠지는 책속에 하나 더 보태는 것도 그렇고 굶어죽는 이에게 쌀 한 톨 역할도 못할 글줄이나 썼다고, 그는 자기가 풀어놓은 책들 모두 거둬들여 훨훨 불살라버렸다
이 세상에 먹고 사는 일만큼 큰 업적이 없으나 또한 먹는 일은 세상일 잘 배워 자신을 만나라고 주어진 것, 자신을 잘 경영해서 CEO 되라는 것 아닌가
오늘 내 안의 부질없는 마음쪼가리들 다 꺼내놓고 마음쇄신 대청소 한다
신지혜 시인 / 도시로 간 짜라투스트라
내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권력의 시종들아, 나는 이 세상 공장이 찍어낸 듯 세뇌된 인간이 되지 못했다 내가 가진 재산은 오직 자유와 유랑
나는 누구의, 무엇에 끈에도 묶이거나 얽매이지 않았다 하물며, 신의 으름장에도 눈 한번 깜박이지 않았으며 늘 내 의지의 파장대로 오직 배포로 살았거늘
그래 나는 이 세상의 환에도 결코 속아 넘어가지 않았으며 나마저도 고정된 나라 믿지 않았다 내가 내 것이라고 시인한 적 없으며 가라 또는 머물라 해도 나는 내 의지대로 떠돌았다 이 지구에서 배운 양식대로 살지 않았다고 누가 내게 화살 겨누겠는가
대중들이여, 홀로인 내게 대체 뭐라고 하는 건가 나는 살기 위해, 내 삶을 도구로 결탁하거나 공조하지 않았다 뒷골목 암거래로 내 양심과 영혼을 팔아치우지 않았다 나는 늘 무엇에 구속된 적도 없고 해방된 적도 없거늘 아무도 내게 세상의 수갑을 채우거나 간섭할 수 없다 누구에게 엎드려 칭송하거나, 세계, 국가, 단체에 맹종하여 서명한 적 없다 나는 오직 찰나마다 알아차림하고 지내왔으니 나는 나를 어디에도 빼앗기지 않았다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다만 살아 숨 쉬는 순간마다 들숨 날숨 누리고 있을 뿐 나는 늘 여럿인 듯 당당한 혼자였다 나는 통속적인 누더기 사상과 굴종일 뿐인 객설의 외투를 벗어던졌다
"나는 스스로 돌보는자"
맨해튼 빌딩 숲을 유유히 걸어가는 짜라투스트라는 빙그레 웃으며, 야유 퍼붓는 대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니체(Friedrich Nictzsche) 저
신지혜 시인 / 물의 얼굴
물의 얼굴을 보았다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목구비를 만지려고 했더니 그만 사라졌어요 아니, 순식간에 날아갔다고 푸드득거리는 날갯짓소리 들었다고
세면대에 수돗물을 틀어놓거나 샤워기 속에서 쏟아져 내리는 이 제멋대로 자유자재한 모습의 존재가 다른 별에는 없는데 유독 지구표면에만 젤리처럼 악착같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분말처럼 부서지지 않고 혼자인 듯 여럿이 부드러운 힘으로 사람을 키우고 들꽃을 빚고
매초, 삶과 죽음의 궤적을 그리며 몸 안 심산유곡 휘돌아 치는 물소리, 하지만 물의 힘을 아는 사람들은 산목숨 물주머니 아닌 것 하나도 없어 무릇 인연 스칠 때마다 서늘한 숨꽃 툭, 틔워준다 한다 단 한번도 그 변화무쌍한 천의 얼굴, 바로 본 적 없으나 그 품이 넉넉하다 한다
신지혜 시인 / 아득한 골목 저편이 아코디언처럼 접혔네
내가 현관문을 밀고 나가자, 아득한 골목 저편이 아코디언처럼 접혔네 저편 우주 끝에 가 닿는 결무늬, 다시 밀려와 내 몸속을 통과했네 내가 휘적휘적 길 걸어갈 때, 몇겹의 공기가 푸드득 찢겨져 너풀거렸네 이따금씩, 휘둥그레진 그 눈알 속에 수천의 내 얼굴 촘촘히 박혀있었네 문득문득 저편, 파스텔의 전생들이 흘깃흘깃, 나를 바라다보네
타박타박 걷다가 뒤돌아보면 공기 소용돌이가 나를 따라오네 어쩌다 올이 풀린 공기알이나 찌그러진 공기 한 알도 누군가 재빨리 수선하네 노오란 햇살의 실밥들이 자욱히 흩날리네 길 앞, 저쪽이 접혔다 펴질 때마다 우주건반이 루루 경쾌하네 나는 거리의 악사처럼 길을 가슴에 껴안고 연주하네
신지혜 시인 / 안개 파크
내 팔을 만져보아라 내 몸은 안개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물론 내 뼈와 피의 원료 역시 차가운 안개, 내 숨소리 귀 기울여보면 안개들이 바스락거리며 깨어나는 소리, 말소리, 흐느끼는 소리, 내 딱딱한 입술은 안개 콜크로 밀봉되었다 어쩌다 힘겹게 내 입술을 딸 때마다 스스스 흩어져버리는 희고 미끄러운 말들,
내 폐부 깊숙이 혹은 뇌 속에도 안개를 쏟아 붓는다 이제 안개에 흠뻑 중독 되버린 사람들이 안개 목책에 기댄 채 차륵, 차르륵 서로의 뼈 뭉개지는 소리 듣는다
나를 낳은 무수한 안개 아버지와 어머니들, 그들 중, 어느 누구는 혹여 내 몸에서 태어나기도 하였으리 혹은, 한때 내가 낳은 아이는 내 전생의 오래된 안개 조상이기도 했을 것이리
나는 지금, 곧 사라져버릴 안개레스토랑에서 신선한 안개 한잔 주문한다 안개는 방부제 없이도 결코 상하지 않는다 천 오백년 전 안개젖소의 온기가 아직 스며있다 벌써 창밖엔, 머리칼 치렁하게 나부끼던 위핑 윌로우 칩 나무들 무릎아래가 반쯤 잘려 나갔다
안개집으로 속속 귀가할 우리들 서로 다정하게 안개웃음 한 컵씩 나누고 등을 돌린다 고대에도 먼 미래에도 다시 잠깐씩 사라졌다 다시 떠오르는 바로 그 황홀한, 안개 타운인 것이다
신지혜 시인 / 허공에 밑줄을 긋고 가는 새
허공엔 아무것도 없는데 밑줄을 긋고 가는 새, 새는 자취를 감추었는데 허공에 그어진 금, 아직 사라지지 않는다 이리저리 휘몰리는 구름물고기 떼도 결코 지울 수 없는 밑줄
허공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어머니 정맥 같은 밑줄 한 줄 각인되어 있다
어머니, 그토록 원하시던 새가 되신 것일까 나 밑줄 친 허공 한 페이지 꺼내 읽는다
맹물 같은 저 허공의 가슴속엔 요동칠 슬픔이나 채 남아있겠는가 푸른 별무덤 가득 찬 허공엔 무수한 생채기뿐
집 뒤 텃밭에 사약 같은 독초 한 그루 몰래 심어놓고 어머니, 때때로 청산가리 같은 햇빛에 젖은 생 널어 말렸던 것을, 어둑한 골목골목 누비며 이쪽 허공 끝에서 저쪽 끝으로 마른번개 토하는 구름사자 처럼 혼자 포효했던 어머니, 갈라터진 맨발로 장바닥 헤매며 건어물이며 야채를 호곡 소리처럼 외치다 귀가할 때마다 저 허공 속곳 깊숙이 넋두리 한 잎씩 꾹꾹 눌러 넣어놓고 음각했던 어머니
이젠 흙을 밟지 않아도 되는 날개 한 벌 받아 입으셨던가
어느 겨울날, 이마에 머릿수건 질끈 동여맨 채 눈발 뚫고 서둘러 이 생의 문밖으로 외출하신 어머니, 저 허공엔 지워지지 않는 밑줄 한 줄 처연히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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