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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도선 시인 / 청록산수 바보산수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2.
최도선 시인 / 청록산수 바보산수

최도선 시인 / 청록산수 바보산수

-운보 김기창

 

 

사물의 소리들을 눈으로 듣고 있다

창공에 부서지는 새들의 지저귐도

군작도群雀圖 참새 떼 소리 화폭 가득 붓는다

 

청력을 잃고 나서 마음으로 모은 소리

갯벌에서 들려오는 군해도群蟹圖 게 떼의 와글거림

세 악사 신바람까지 들썩였던 악기 소리

 

청록산수 바보산수 예수와 귀먹은 양

간절히 붓끝에 담은 청아한 저 소리들

군마도群馬圖 힘찬 말발굽 소리도 그림으로 듣고 있다

 

 


 

 

최도선 시인 / 서설(瑞雪)

 

 

밤새 주먹만 한 눈송이가 발자국 소리도 없이

솔밭으로 잦아들었다

 

누가 온다는 건

참 좋은 일

 

과거에도 미래에도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건

참 좋은 일

 

그러므로

날마다가 참 좋은 날*

문득,

참새가 푸드득거리며 날아드는 바람에

 

솔가지에 얹혔던 눈들이

푸 하하하 흩날리며

 

검은 하늘이 환해지고 있었다

 

*『벽암록 』 6칙에 나오는 ‘雲門日日是好日’에서 따옴

 

 


 

 

최도선 시인 / 낙과를 보며

 

​사과 하나 푸석 떨어져 나뒹굴 때

개미들 몰려와 파고든다.

내 마른 몸 땅에 묻히면

누구에게 저리 보시할 수 있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코카사스 산중은 아니더라도

야산 너럭바위에 올려져

야윈 새에게 뜯어 먹혀

그의 둥지에 뽀얀 새알로 태어난다면

세상에

크고 둥근 무덤은 남기지 않았더라도

조금은 애틋한 삶으로 남아

그 새

봄 오면 종다리처럼 높이 떠

푸른 언덕에 노래 한 곡조 남긴다면, 그러면

어느 별 옆에 떠서

하얗게 웃고 있으리

 

 


 

 

 최도선 시인 / 연기설

 

 

친구가 스마트 폰을 열어 사진 한 장 보여준다

 

무, 두 개가 미끈한 다리 가랑이를 꼭 끼고 붙어 있다

남녀의 완전한 섹스 장면이다

수줍은 소녀의 미소 같은, 숫총각의 어릿한 순수 美

 

어느 투박한 땅속에서 뿌리를 내리다 만났을까?

 

세상에 알몸을 다 들어내 들킬지언정

이쪽저쪽을 할퀴지 않으려는 화신으로 엉키어진 몸

 

뿌리내릴 때 길을 막던 자갈돌도 몸이 되고

살을 파먹던 미물들도 몸이 되어

 

우주 만유의 날개를 달고 땅속에서

깊디 깊은 사랑을 이룬

 

-시집 『서른아홉 나연씨』 (지혜, 2015)

 

 


 

 

최도선 시인 / 일몰은 일출을 기다린다

 

 

분별을 일깨워주는 낮도 밤도 아닌 시간

집으로 돌아가며 하루를 뒤돌아볼 때

고독이 바다를 이뤄도 팔달문 불빛 따스하다

 

아버지* 이장하며 뜻을 새겨 세운 성곽

다 잊고 일출이라는 눈동자만 바라왔을

그의 뜻 새겨볼 일이다 오래오래 낙낙樂樂히

 

*사도세자를 양주에서 이장하며 성도 축성했다.

 

-수원화성 테마 시집 《물고을 꽃성》 2023.

 

 


 

 

최도선 시인 / 질문

 

 

나무가 사람이 된다면

그가 뿜어낸 냄새는 어떨까?

 

사람이 나무가 된다면

그 나무는 어떤 향기 풍길까?

 

태산목 흰 꽃잎 따 물고 느릿느릿

산길을 내려오며 떠올린 생각

 

사람이 나무가 된들 사람 냄새지

 

땅에게 물었다

나 죽은 몸 아닌

살아있는 몸

심을 수 있느냐고

 

나무처럼

 

 


 

 

최도선 시인 / 그 도시에 먼저 온 아르카디아

 

 

천산산맥 머리 위 만년설을 넘어온

아침 해 숨이 차다

태양의 도시 히바로 가기 때문이다

 

이찬칼라 황토색 성벽은 시간을 박제시켜 놓았다

에메랄드빛 타일 미나렛엔 하루 종일 머물러 있어도 지루하지 않다

모스크에서 들려오는 주문 같은 소리에 영혼이 리듬을 탄다

 

나는 오래 머무를 수 없다

태양과 함께 빚어온 황금빛 중세도시

골목골목 남겨진 숨결의 미로

주마 모스크 안 200여 개의 기둥 바닥에 빛이 꽂힐

신기루가 발등을 타고 오른다

 

타쉬 하울라 궁전에선 유르타를 만났다

길없는 사막을 건너온 대상들이 쉬어가던 곳

잠잠히 스쳐가는 석륫빛 옷깃

아르카디아의 외계

담벽에 모여 앉은 실크 스카프

손뜨개 낙타 숄이 목을 휘감는 곳

 

흙길에 나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는 오후

만년설 반대편으로

한낮을 태우던 태양도 스르르 넘어간다

온종일 반짝이던 미루나무 파닥이며 잠드는 마을

 

까만 염소를 앞세우고 볼이 발그레한 아이가 흙담 아래 가고 있다

 

-시집 『그 남자의 손』(시와 문화, 2019)

 

 


 

최도선 시인

강원도 춘천 출생.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으로 등단. 1993년 <현대시학> 소시집  발표 후 자유시 활동. 시집 『나비는 비에 젖지 않는다』 『겨울기억』 『서른아홉 나연 씨』 『그 남자의 손』. 비평집 『숨김과 관능의 미학』. <시와문화>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