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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형술 시인 / 겨울나무의 눈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3.
김형술 시인 / 겨울나무의 눈

김형술 시인 / 겨울나무의 눈

 

 

느닷없는 섬광이 하늘을 깨뜨렸다

하늘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얼음폭풍이 왔다

 

화살나무는 제 스스로 뺨을 후려치고

제 가슴 사정없이 두드리며 폭풍과 맞섰다

 

탄환처럼 몸에 와 박히는

날 선 얼음조각들에게

변명하지 않고

비명을 지르지 않으며

 

기꺼이 몸을 내어주는 나무를 향해

으르렁 미쳐 날뛰는 바람

 

온 밤 내 휘몰아치는 바람 속

제 몸 속 깨어진 하늘조각들을 품어

잠들지 못하는

 

얼어붙은 나무의 몸에서

날카로운 푸른 빛이 새어나왔다

휘청거리는 어둠을 꿰뚫었다

 

폭풍이 그친 아침 겨울산

나무들은 일제히 세상을 향해

가지를 뻗었다

 

오직 한 곳

을 가리키는 가지 끝마다

시리게 투명한 눈들을

매단 채

 

ㅡ「시인정신」2016년 가을호

 

 


 

 

김형술 시인 / 바깥

 

 

문을 열자

귀퉁이가 허물어지고

더러운 발자국이 찍힌 상자의

문을 열면 의자

온몸에 강철가시를 돋운 채

비스듬히 돌아앉은 의자의

문을 열면 어머니

남몰래 누군가를 기다리다

어깨가 굽어버린 어두운 골목의

문을 열면 지옥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

헤아릴 수 없는,

한 번도 건너지 못한

들끓는 말들의

문을 열면 벽, 죽을 때까지

열고 또 열어야할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저 겹겹

 

-시집 『사이키, 사이키델릭」에서

 

 


 

 

김형술 시인 /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바람 멈추고 어둠을 불러 세우고

아득한 시간 저쪽에서

흰 물고기 떼 날아오네

꽁꽁 언 별들 비껴선 자리

예고도 없이

층층 겹겹 고요를 건너

먹먹한 귀속으로 들리는 노랫소리

길, 수렁, 거울, 폐허

뒤척이는 처마 밑 가리지 않고

거기가 원래 제자리였다는 듯

스스럼없이 도착하네

앉거나 눕네

아무 원망도 저항도 없는

저 부드러운 무질서의 질서

혀를 거두고

제 몸의 빛깔을 지우고

비늘, 지느러미, 딱딱한 뼈를 버린

흰 살점, 가벼운 몸뚱아리들

밤의 무게를 들어 올리네

싱싱한 물 냄새를 풍기는

신성한 무덤들이

쿵쿵 가슴 두드리는 적막 묘비 삼아

세상 가득 일어서네

나는 없고 노래만

너는 없고

너무 많은 물고기 떼만

 

 


 

 

김형술 시인 / 원동역*

 

 

낙동강 복사꽃행렬 열차를 따라

서울로 북쪽으로 줄지어 달려갈 때

꽃붕어 버들붕어 각시붕어 참붕어

원동천 좁은 지류 수초 속으로 숨는다

 

봄낮은 짧고 산란기는 길다

 

노곤한 노동을 가로지르는 실개천

여린 수초 가지마다 안간힘으로 슬어놓은

숨어흘린 눈물방울 같은 알들, 목숨들

 

꽃으로 달려갔다 잎으로 돌아오는 바람이 품어안는

 

터널 하나만 지나오면 도시의 끝

강의 초입

 

버들개 버들치 연준모치 기름종

어린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는

강가의 작은 점 하나

 

*원동역: 경부선에 있는 기차역으로 삼랑진역과 물금역 사이에 있다.

 

-한국시인협회 사화집 《역驛》2021년

 

 


 

 

김형술 시인 / 봄 저녁 시냇가에서

 

 

푸른 물기 머금은 별들

자작나무 흰 가지마다 피어나는 저녁

들릴 듯 안 들릴 듯 희미한 물소리

어둠 속으로 길을 냅니다

 

아무 기다림도 없는 마음으로

누가 이리 깊은 적막을 풀어 놓는지

오늘 밤은 아마도 저 별들을

하나도 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적막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는 걸

모르냐는 듯 출렁이는 별들의 눈빛

차마 마주 대하지 못하고

오래 전에 묻어 버린 이름 하나만

등 뒤에다 감추고 돌아섭니다

 

시간 속에 숨겨 놓은 한 시절 햇빛

눈 시리게 화안한 웃음, 뒷모습

그 모든 슬픔 잠든 꽃무덤 하나

누구의 가슴엔들 없으랴마는

 

꽃내음 지천 흩어지는 이런 저녁엔

그저 물소리만 따라 걸으며

가만가만 발끝만 헤아립니다

 

꽃잠 고요한 어둠 속을 따라오는

눈매 푸른 별 하나

애써 외면하며 돌아옵니다

 

 


 

 

김형술 시인 / 푸른 눈

 

 

말 안 듣는 아이 하나

낳고 싶다

늘 심통이 가득 차 있어서

곁눈으로 흘겨보고

틈만 나면 앙탈을 부리는 탓에

아래로 위로 또 옆으로

빙글빙글,버둥버둥

얇고 작은 팔,다리의 흔들림이

멈출 날 없는

지독하게 말 안 듣는

아이 하나 낳고 싶다

세상의 모든

윽박과 명령과 훈계 따위

철퍼덕 주저앉아 온몸으로 거부하며

싫고 또 싫음을 노래로 가진

눈매 푸른 아이 하나

내 앞을 지나간다

 

 


 

 

김형술 시인 / 무인도

 

 

 수심 깊이 물휘돌이 거느린 깎아지른 벼랑으로 서서 쪽배 한 잎 허락지 않는 네 무언의 거부는 두려움이다. 두려워 소름 돋는 아름다움이다. 몸 속 한모금의 물, 한 포기의 풀마저 버리기 위해 만난 안개와 태양을 어느 가슴이 헤아릴 수 있을까. 헤아려 어느 물너울에 새길까.

 

 수평선은 절대권력이다. 산 것들의 노래와 울음, 노회한 시간들의 기호와 상징, 그 어느 것도 가로 막을 수 없는 힘으로 달려가는 저 완강한 직선을 너는 꺾어놓는다. 무심히, 문득 멈춰 세운다. 방점, 깃발, 음표, 표지판... 누구도 규정짓지 못하는 너는 아무 것이며 아무 것도 아니므로 자유, 누구의 침범도 규정도 불가능한 완벽한

 

 언어를 버려서 너는 언어다. 사방 드넓게 열린 언어만이 사나운 바람을 길들이지 않는다. 수면과 구름 사이 제멋대로 오가며 바람은 함부로 발자국을 남기지만 너는 여전히 요지부동, 점ㆍ점 꽃씨 같은 별들이 흩뿌리는 생생한 날것의 눈빛에도 흔들리지 않는, 세상의 중심 깊숙이 내린 너의 뿌리는 어둡고 차고 향기로울 터.

 

 어떤 뭍의 비유도 범접하지 못하는 묵언의 자존 하나가 거기 있다. 떠나고 또 떠나서 아주 멀리.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아 강건한 빈 마음으로 서 있는 듯 떠다니는 듯.

 

 


 

김형술(金滎述) 시인

1956년 경남 진해 출생. 1992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 『의자와 이야기하는 남자』 『의자, 벌레, 달』 『나비의 침대』 『물고기가 온다』 『무기와 악기』 『타르초 타르초』. 산문집 『향수 혹은 독』 『영화, 시를 만나다』. 2010. 제22회 봉생문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