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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명림 시인 / 하루 또 하루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3.
김명림 시인 / 하루 또 하루

김명림 시인 / 하루 또 하루

 

 

암 투병 중인 그가

새벽 산책길에서 알밤을 주웠답니다

내년에도 주울 수 있을지

불규칙한 미래가 수상하여

가슴 한쪽에서 서리가 내렸다며

씁쓸히 미소 짓는 그의 얼굴

마른하늘에 천둥 번개 칩니다

내년엔 다람쥐도 청설모도

당신에게 모두 양보할 거라

너스레를 떠는 내 얼굴 위로

순간 소낙비가 다녀가십니다

생선가시 발라숟가락에 얹어 주는

37년 만에 처음 하는 일에

신혼인양 느껴지는

소소한 일상에서 벗어난 후에야

소중함을 깨우치는 시간입니다

긍정이 부정을 밀어내고

희망이 좌절을 밀어내는

하루가 또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시집 <내일의 안녕을 오늘에 묻다>

 

 


 

 

김명림 시인 / 가족

 

 

닭장 바닥에 핏자국이 선명했다

내장을 도난당한 병아리의 흔적

다음날 또 한 마리가 당하지만

범죄는 미궁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내가 CCTV가 되어

지켜보기로 했던 저녁이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먼저

홰에 오른 어미 닭의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미처 날개 자라지 않은 병아리들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번번이 곤두박질을 쳤다

목숨 건 곡예란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올라오라고, 올라와야 산다고!

닭장 속 어미의 속울음이 가득했다

병아리들 모두 홰에 오르자

보름달도 잿빛 커튼을 걷으며 활짝 웃었다

횃대에 나란히 앉아 있는 병아리 일가를

칼끝처럼 바라보고 있던

검은 물체가 쏜살같이 달아났다

 

 


 

 

김명림 시인 / 콩국수 한 그릇이면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여인

치렁치렁 걸친 귀금속이

호들갑 떨며 아는 체하는데

타임머신을 타고 황급히 노를 저어 봐도

기억은 오리무중

아무개 엄마 삼십만원 꿔줌

지난 가계부를 뒤적이다가

오리무중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칡넝쿨 뻗어 나가듯

여기저기 빚지며 살다가

넝쿨뚝 자르고

미로 같은 숲속으로 숨어버렸던

어찌하여 사모님이 되었는지

나 알 바는 아니지만

더운데 콩국수라도 한그릇 먹자 했으면

십년 세월에 훌훌 말아

시원하게 잊을 수도 있었는데

 

 


 

 

김명림 시인 / 부모

 

 

1. 홍어

 

함지박 머리에 이고

골목골목 누비시던

 

홍어냄새

땀 냄새

육 남매가 먹고 크던

 

한 겨울 청대靑竹 같았지만

때론 유행가 안주 삼아

소주 몇 잔으로 달래던 生

 

내 면사포에까지 따라와

목 메이던

 

그 살점 당신 같아서

냄새만으로도 아파 와

눈물에 찍어 삼키는

 

2. 자두

 

붉은 자두 한 알

조몰조몰 만지다

젖내 나는 숨소리 듣습니다

 

쉰둥이인 내게

젖가슴 살살 문질러

입에 물려주던 부드러운 그 감촉

 

넋 나간 창가에 앉아

낡은 세월 보듬고

먼산바라기 하는

산수傘壽의 어머니

 

햇볕 속, 자두씨 한 알

뼈 속까지 말라갑니다.

 

 


 

 

김명림 시인 / 헌책방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다

 

 

오랜만에 헌책방에 들렀더니

너덜너덜한 옷을 입은

어느 중년 여자가 내 팔을 꼭 잡는다

 

신경질적으로 팔을 빼내는 내게

잠깐 앉으라며 둥그런 나무의자를 내민다

자판기 커피를 건네는 종이컵이

풍 맞은 사람처럼 떨고 있다

 

삼십 년 전,

어느 대학생이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사랑을 속삭이던 자신을 이곳에 버렸다며

품속에서 꽃 같은 사진 한 장 꺼내주는데

아, 오래전 내가 버렸던 여자가 아닌가

 

사라져가는 청계천 헌책방에서

용케 견디며 나를 기다려 온 그녀가

눈물 나게 고마워

살쾡이 같은 마누라 몰래

책꽂이에 원룸 하나 얻어놓고

 

밤마다 은밀히 만나는

숨겨 놓은 내 여자

 

 


 

 

김명림 시인 / 첫사랑

 

 

시를 옮겨 적다가

시인의 이름을 바꿔 버렸다

무심코

써버린 이름 석 자

지독히 몸살을 앓았던

첫사랑의 파편이

세월의 강을 넘지 못하고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있었던가

누구에게라도 들킬세라

얼른 흔적을 없애려니

반백의 그가

내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아직도 강물은 흐르고 있는가.

 

 


 

 

김명림 시인 / 늙은 구두

 

 

한겨울 빙판길에도

똑똑 맑은 소리를 내며 걷던 그녀

언제부턴가

낡은 바이올린 소리로 삐끗대더니

시나브로 외출하는 횟수가 줄어들었지

어쩌다 문밖을 나서려면

빈 유모차가 발이 되고

때로는 지팡이가 발이 되더니

노인요양원으로 들어갔다고

그러다가 한 생애를 마감했다는

노을 같은 소식을 부쳐왔지

 

 


 

김명림 시인

강원도 양구 출생. 2011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시집 『어머니의 실타래』 『내일의 안녕을 오늘에 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