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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영옥 시인 / 훗날의 장례식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3.
배영옥 시인 / 훗날의 장례식

배영옥 시인 / 훗날의 장례식

 

 

주인공인

나만 없을 것이다

벅찬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워

일찍 떠났으므로

엉킨 실타래 같은

검은 부재의 바람이 불고

태극기 휘날리고

잿빛 비둘기들만 구구거리며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무거운 공기가

이제 진짜 안녕이라며

작별을 고할 것이다

새 없는 공중으로 검은 비가 내릴 것이다

한가한 사람들도 오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인 나만 홀로

슬플 것이다

 

 


 

 

배영옥 시인 / 귀

 

 

나는 가장 아픈 귀였다

피부보다 민감한 통점이었으며

소음의 배후였다

고집이 세었지만

언제나처럼 뿌리는 없었다

나는 부적절한 귀가 지은 죄였다

부글거리는 문장을 오래 품고

발설하지 않는 인내는

절대 미덕이 아니었다

나의 내부가 늘 고요했다면

공사장 소음을 뚫고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따금 귓바퀴가 아파오고

구름도 작약꽃도

단풍나무 숲도

가장 아픈 문장을 엿듣고 말았다

처음과 끝처럼

후회는 결코 혼자 오지 않았다

세상의 한 귀가 부서지고

기우뚱 균형을 맞추려던 그때

나는 이 세상도 오래 앓았던 귀라고 믿었다

 

 


 

 

배영옥 시인 / 가나안교회는 집 뒤에 있지만

 

 

골목길을 걸을 때

예수 믿으세요

매일 만나는 그녀

물티슈 한 봉을 건네준다

 

나는 당신의 어린 양, 속죄의 기도를 올리기엔

내 두 손은 너무 많은 어둠을 더듬거렸고

내 두 눈은 검붉은 장미가 가득했다

 

매번 식탁 위에 쌓이는

가나안교회, 약속의 땅에 닿기도 전에

나는 먼저 그녀의 눈먼 충복이 되어버렸다

 

책상 위 먼지를 훔치거나

벽지에 말라붙은 모기 피를 닦아내거나

방바닥의 김칫국물을 제거할 동안

단 한 번도 가나안교회를 찾아가지 않았다

 

한 장씩 가볍게 손끝에 잡혀 올라오는

물티슈의 다양한 쓰임새를 되새기면서

 

가나안교회,

죄를 사하는 물티슈의 세례가

이토록 가볍다면 지금 나에게는 가장 필요한 게 아닌가

 

내게는 가장 편안하고

가장 안전한 장소

가나안교회는 늘 집 뒤에 있지만

 

 


 

 

배영옥 시인 / 사람꽃

 

 

암 병동 외래센터에

보라 꽃, 흰 꽃, 분홍 꽃이 활짝 피었다

얼굴이 얼굴을 감싸고

두건 꽃이 피었다

 

먼 산이 저물어갈 때

홀로 빈 산을 지키는 감국처럼

한 사람에 딱 한 송이씩

떼어내야 할 꽃잎들, 주름들을

헛웃음 속에 감춘

저 사람꽃들을 보아라

 

자분자분 허공을 떠다니는 헛꽃들

흔들리는 중심을 감싸 안으며

만개한 햇빛 속으로

웃음꽃을 피워 올리고 있다

 

향기 없는 꽃이

천리를 가듯

꽃 지고 꽃 피는

저 사람꽃들의 천국으로

한 발 더 가까이

새들이 난다

 

 


 

 

배영옥 시인 / 담쟁이

ㅡ아버지

 

 

 당신의 빛나는 손바닥을 가진 적이 있지. 당신 손바닥 위에서 나는 검불처럼 잠들기도 했지. 당신을 열면 당신이 사라질까봐 나는 매일 뒷골목을 맴돌았지. 당신 손바닥에 있을 때만 나는 어린아이였지. 여전히 어린아이고 싶었지. 당신 손바닥에 달린 천 개의 창으로 나는 세상을 보았지. 당신 손바닥이 보여주는 뒷골목의 사람들은 아름다웠지. 당신을 열면 당신이 사라질까봐 나는 매일 붉은 벽에 서서 바람을 마셨지. 지독한 행복이었지. 당신 손바닥에 아로새겨진 그 빛나는 상처를 품고 나는 어른이 됐지. 어린아이고 싶은 어른이었지. 혼자서도 손바닥을 뒤집을 수 있는 어른이었지만, 나는 결코 손바닥을 뒤집을 수 없었지. 행여 당신 손바닥이 쏟아질까봐, 당신을 열면 당신이 사라질까봐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살았지. 그리운 기척 같은 버릇이었지.

 

 


 

 

배영옥 시인 / 재활용함

 

 

 그의 검은 손이 헤집어내는 것은 어제의 네 윗도리가 아니라, 어제 그제의 네 구두가 아니라, 어제 그제 그끄저께의 네 속옷들이 아니라, 젖내 풍기는 젖먹이의 배냇저고리가 아니라, 네가 태어나기 이전 너와집 아궁이의 다 타버린 재가 아니라, 그가 가슴에 한 아름 가득 안아 낡은 1톤 트럭에 쌓아놓은 저것은, 어제의 그가 울컥울컥 게우던 피울음이 아니라, 어제 그제부터 갑자기 말라버린 피폐한 그의 육신이 아니라, 까마득한 옛날 신의 분노로 범람하던 붉은 강물이 아니라, 우리가 태어나 울고 웃고 다시 울음으로 몸을 부리고 돌아갈 어느 생의 아픈 상처를 다시 헤집어놓은 것이라면, 그가 몇 아름이나 반복해서 부려놓은 저것은, 트럭 위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저것은, 맞춤처럼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모든 기억의 추억의 토사물*은 어떤 낱말로도 재활용되지 않을 텐데

 

* 최승자 시인의「雨日 풍경」에서 따옴.

 

 


 

 

배영옥 시인 / 또 다른 누군가의 추억으로 남을

 

 

나는 끝내

의자 아래 묻힌 신전을 모를 것이고

의자 또한 나를 모를 것이고

의자 위의 사과는

나에게 관심조차 없는데

나는 오늘도 의자를 기다리는 사람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애써 소환하는 사람

의자를 관(棺)처럼 떠받드는 사람

오래도록 동행해야 할 목숨과

매일매일 불화하는 사람

짙어지는 어둠과

푸르른 이끼를 끌어다 덮는 사람

그러니 나날이 봉분을 쌓는 어지럼증이여

의자를 경배하라

나는 오늘도

또 다른 누군가의 추억으로 남을

뿌리 깊은 의자에 묻히노니,

아무도 나를 찾지 마라

 

 


 

배영옥 시인 (1966-2018)

1966년 대구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졸업.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뭇별이 총총』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천몽' 동인으로 활동. 2018년 6월11일 지병으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