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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권 시인 / 아버지의 걱정
올해는 중랑천 둔치 길의 장미가 가시가 여물기도 전에 피었는데 각시붓꽃은 보름이나 늦게 피었다 입시를 앞둔 딸들의 보충학습처럼 어쩐지 지구의 자전도 늦게 귀가할 것 같다 눈 한 쪽을 흐릿하게 하는 백내장에 관한 일기를 최근에는 자정이 넘도록 적었지만 유월로 접어드는 첫날에도 황사는 자욱하다 개똥지빠귀 한 마리가 이제 물들기 시작하는 버찌를 쪼아 먹는 광경을 보면서 먹고 사는 일이라는 것이 참으로 엄숙하다고 생각해 보았는데 하루 두어 끼니 건너뛰며 사는 것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오래 걸어둔 냄비는 왜 저렇게 땡그랑 땡그랑 풍경소리를 내는지 21세기에도 왜 이토록 가난은 힘이 센지 개똥지빠귀처럼 날개도 부리도 가지지 못한 내가 아, 착한 내 딸이 대학에 들어가고 걱정마라 등록금쯤은 아비가 마련해 놓았다고 말할 그날에도 지구여 무탈하기를 오늘은 일요일이라 노인도 청년도, 데리고 나온 시츄 강아지도 일본발 방사능이 절망처럼 스며드는 산책길에서 나른하다 물색없이 붉은 장미 한 송이도 모두 내가 지은 결과이오니 꽃들아 할 말이 없다
박형권 시인 / 냉잇국
어제 저녁 식탁에서 공연히 냉잇국을 화제에 올렸더니 식전에, 아버지 어머니가 나물 칼을 들고 아직 어려서 향기도 없을 처녀의 가슴을 베러 가셨다 흰 젖을 내비치는 냉이 이제 막 돌기 시작하는 유선을 위해 초봄은 춥다 모든 계절을 향해 왈칵 풋가슴을 열어 보이는 여린 것들에 이끌려 두 분은 연둣빛의 신도가 되셨다 좀 더 키워서 초대해야 할 봄이 있다. 이 애처로운 걸 어떻게 먹으라고 캐 오시는지 그러나 모르시는 말씀 냉이 찾았어! 하는 순간 애가 어른 되고 어른은 늙어버린다 그러므로 냉잇국은 순간의 음식 인생은 쏘아놓은 화살 같아서 향기로운 것 냉잇국 한 숟갈 떠서 머금어보는 사이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벌써 아버지 어머니가 나물 캐다가 바구니 집어던지고 꿈을 꾸기 시작한 그 위대한 봄바람이다 수캐처럼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킁킁킁 냄새 맡게 된 냉잇국에서 최초로 사내를 다리사이로 끌어들인 수십만 년 전 처녀의 움푹한 풀냄새가 난다 나는 나른해져서 그럭저럭 살다간 사람들의 무덤가에 따뜻하게 눕는다
박형권 시인 /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장마전선이 물폭탄을 쏟아부은 동네의 자작한 하수도를 따라 늘 곰팡이가 솟아오르는 우리의 정오(正午)를 지나서 나팔꽃 아래 듬성듬성 파인 골목으로 들어선다 비가 새지 않으면 방이 아니라고 믿는 공인중개사의 늙수그레한 자전거가 앞장을 서고 딸 자전거를 타고 나온 비옷 같은 아내가 그 뒤를 따르고 나는 아내의 젖은 꼬리를 물고 아직은 종아리가 단단한 페달을 밟는다 이 서울의 지표면에는 창틀이 마당과 맞물린 우리의 꿈을 품어주려고 축축하게 젖어서 기다려주는 반지하 단칸방이 있어 우리의 미래는 송이버섯처럼 번창하리 보증금 삼천오백만원은 우리 생명보다 소중하여 왼쪽 가슴에 단단히 찔러넣고 두근두근 돈이 심장소리를 들을 때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대체 어디서 자고 무엇을 먹기에 그렇게 끈질기게 살아남는지 참새들이 골목에 나와 고단한 날개를 말린다 언젠간 바퀴를 크게 저을 수 있지만 오늘은 기어를 저속에 놓고 우린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우리 네 식구가 냄새를 풍기며 구더기처럼 꼬물거릴 그 기도(祈禱)를 찾아서
박형권 시인 / 우두커니
겨울상추 좀 먹어야겠다고 지푸라기를 덮어둔 산 아래 밭에 상추 어루만지러 어머니 가시고 빵 딸기 우유사서 뒤따라 어머니 밟으신 길 어루만지며 가는데 농부 하나 우두커니 서 있다 아무것도 없는 밭 하염없이 보고 있다 머리 위로 까치 지나가다 똥을 찍 갈겨도 혹시 가슴에 깻잎 심어두어서 까치 똥 반가이 거두는 것인지 피하지 않는다 무얼 보고 있는 것일까 누굴 기다리는 것일까 아무 것도 없는 밭에서 서 있을 줄 알아야 농부인 것일까 내가 어머니에게 빵 우유 드리면서 손 한번 지그시 어루만져 보는 것처럼 그도 뭔가 어루만지고 있긴 한데 통 모르겠다 뭐 어쨌거나 달이 지구를 어루만지듯 우주가 허공을 어루만지듯 그것을 내가 볼 수 없듯이 뭘 어루만지고 있다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어루만지는 경지라면 나도 내 마음 속에 든 사람 꺼내지 않고 그냥 그대로 두고 서 있고 싶다 그냥 멀찍이 서서 겨울 밭처럼 다 비워질 때까지 그 사람의 배경되는 것으로 나를 어루만지고 싶다 앞으로는 참을 수 없이 그대를 어루만지고 싶으면 어떤 길을 걷다가도 가운데 사뭇 서야겠다 상추 한 아름 받쳐 들고 내려오며 보니 마른 풀도 사철나무도 농협 창고도 지그시 지그시 오래 서 있었다
박형권 시인 / 덕배는 파도 위에서 한다
나이 오십 바라보니 세상에 꽉 찬 것들도 다 헐렁해 보이기 시작하고 또 세상의 보드라운 것들이 나 잡수시오 하고 다가와도 가슴 벌렁거리지 않는데 쌍끌이기선망처럼 밀어주고 당긴 네 살 터울 마누라는 늦여름 모자반처럼 부쩍 감겨온다 덕배는 어제와 다름없이 일 톤짜리 조각배에 마누라를 태우고 달맞이꽃 살포시 오므린 밤에 기름 한 드럼을 채워 넣었다. 덕배를 힘껏 짝사랑하던 머큐리 엔진도 우당탕탕 내질러야 할 터인데 이제는 삐걱삐걱 수조기 우는 소리를 낸다 이런 날에는 노래미 볼락들이 심해를 견디기 지루하여 물가로 밀려와 뻐끔뻐끔 담배 피듯 플랑크톤을 흡입하는데 별빛과 검은 밤에 취하여 해롱거리는데 뜰채로 걷어 올려도 사내 몸 끌어당기는 첫 밤처럼 다소곳하다 일하듯 놀듯 물칸 가득 활어를 싣고 보니 큰놈 등록금 머잖아 맞추겠다 싶어 마음이 널찍해지고 고요하고 적적한 바다가 뽀얀 인광을 뿌리며 배의 겨드랑이를 핥는다 바다가 까닭 없이 반딧불이 꽁지처럼 환해지는 밤 마누라가 이 지점이다 싶은지 홍어냄새로 발효하여 덕배의 살점을 포옥 쓸어 쥔다 물그림자 황홀하고 별빛 초롱하다 아직 바다는 전복같이 납작하거나 개불같이 길쭉하다 바다의 凹凸이 새 바다를 낳나니 오목 하나 볼록하나 따로 남지 않는 그런 무탈한 세상 올 것만 같은 밤 덕배가 그거 한다
물칸: 배의 갑판 아래 바닷물을 담아 두는 곳, 활어를 보관한다.
박형권 시인 / 지칭개 골목
지하방 창에 딸깍 불이 켜지면 지칭개 핀 골목이 어딘가로 간다 어딘가, 어딘가, 어딘가로 가고 있지만 선언하노니 그 끝은 없다 지칭개 골목은 떡 골목과 어깨를 걸고 걷다보면 전파상 골목과 만나고 또 치킨 골목과 손을 잡는다 골목에서 시작한 모든 새벽들이 사거리에 모여 사거리로 흩어진다 어디로 가든 서울로 가고 어디로 가든 로마로 간다 그 자하방 창의 목발 짚는 아이는 우루무치로 가고싶어 매일 이백원씩 저금통에 넣고 외삼촌이 사다준 지구의를 돌린다 어디로, 어디로, 어디로 아버지는 지금 가고 있을까 지상의 모든 길을 다 걸어야 치킨가게의 훈제닭을 사서 아버지는 돌아올 것이다 엄마의 손등으로 봉제공장의 미싱바늘이 지나가고 급히 병원 다녀오는 사이 하루가 지나가고 길들이 돌아온다 어깨를 걸고 손을 잡고 밀고 당기면서 지칭개 골목으로 돌아온다 모든 골목이 롤스로이스처럼 기다린다 엄마가 새벽밥 먹고 타고 나갈 지칭개 골목
박형권 시인 / 아내는 더 낮은 음역에서 산다
아침 밥상에 올라오던 우유가 한 달째 뚝 끊어져 집에 돈 떨어졌구나 싶었던 그날도 집 앞에는 낡은 오토바이 한 대 묵묵히 서있었다 타이어는 뼛속까지 닳았고 칠이 벗겨져 검버섯 같았다 고단한 노년 같은 그것이 뒷심은 있어 새벽 네 시만 되면 푸다다다 시동을 걸어서 잠 깨기 딱 좋았다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우유 돌리고 전단지 돌리고 비 오면 비에 맞고 눈 오면 눈에 맞을 그 젊음의 미래는 분명 밝을 것이라고 이불 속에서 아내에게 말했다 그를 혹시 만나면 술 한 잔 같이 하고 싶다고 했다 우당탕 시끄러운 소리를 낼 줄 아는 젊음과 같은 골목을 쓴다는 것이 좋았다 나도 서너 살 젊어져서 아내의 배에 슬그머니 손을 올려놓는데 저 소리는 안 들리세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서 한 할머니가 우리 식구 먹을 우유를 두근거리며 가져가고 있었다 아내는 더 낮은 음역을 들을 줄 알지만 그 동안 모른 체 하고 있었다 더 낮은 음역을 듣기 위해서는 내가 눈 내리는 소리보다 낮아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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