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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 시인 / 겨울 강에서
찬바람이 불어도 아이들은 강에서 얼음을 지치며 놀고 있다. 부모는 오래전에 집을 떠났고 아이들은 조부모와 함께 산다. 할아버지는 길에서 휴지를 줍고 할머니는 가게 앞에 놓인 박스를 주워 고물상에 갖다 주고 쌀을 산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걸려도 아이들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따금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얘들아, 뭘 하고 있니, 집에 안가고? 소리치지만 아이들은 불 켜진 아파트의 창문만 멍하니 바라보며 집으로 갈 엄두를 내지 않는다. 누가 저 아이들을 돌려보낼 수 있겠느냐 눅눅하고 쓸쓸한 지하 단칸 셋방에! 지켜보던 나그네 마음이 심란하기만 하다.
-시집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
민영 시인 / 광주 일박
여기까지 와서 거기를 안 가볼 수야 없지, 원통하게 죽은 넋들이 눈 못 감고 잠든 곳.
붉고 흰 만장들이 소나무 사이에 걸려서 총알같이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었지.
그러나 가신 이들은 말이 없었지. 망월동에 달 뜨면 다시 오겠소!
-<시전집>, 민영, 창비 (2017)
민영 시인 / 무릉(武陵) 가는 길 2
그가 우리를 맞으로 오기까지는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 한다. 우리는 그가 어떤 모습으로 오는지를 모른다. 그는 첫날밤의 신랑처럼 오는가? 머리에 꽃 꽂고 흑단령 입은 세서방처럼 걸어오는가? 아니면, 온몸에 검은 피 두른 꼭두서니 장승처럼 우락부락한 모습으로 다가오는가?
아마도 그는 말 한마디 하지 않으리라. 고갯짓으로만 갈 길을 재촉하고 무릉 가는 길표도 일러주지 않으리라. 그의 등뒤에서는 매운 안개 흩어지고 한 숨결의 바람이 둥불을 흔들리라. 허나 우리는 두려워하면 안된다. 믿음직스러운 신랑의 모습으로 오든 사납고 어두운 장승의 모습으로 오든 두려워 말고 기다려야 한다.
그가 지금 당장 시간의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지만 언젠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서서히 손님 맞을 채비를 해야 한다. 섬돌 위에 고무신도 깨끗이 씻어놓고 진솔옷 한 벌도 마련해 둬야 한다. 그리고 때가 오기까지는 초례청으로 향하는 새색시처럼 뒤돌아보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준비 다 됐습니까? 레디 고!
민영 시인 / 비무장지대에서
약사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륙십년 전에 떠나온 고향마을이 보인다
봄에 타 허물어진 돌담 곁에 접시꽃 한송이가 빨갛게 피어 있다
애들아, 다 어디 있니 밥은 먹었니 아프지는 않니?
보고 싶구나!
-시집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할 곳이 있다>에서
민영 시인 / 꿈에 본 어머니께
어머니, 제가 사는 이 세상 왜 이렇게 눈부신가요?
새들은 새들끼리 굴참나무 숲에서 지저귀고, 하늘에는 새털구름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어머니 계신 그 세상에도 보리이삭 파랗게 패었습니까? 저 앞 새밋들에 실개천 한 오리 반짝이며 흘러가고, 자운영 핀 밭둑 위에 노랑나비 춤추며 날아갑니다
민영 시인 / 서시序詩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꽃도 철따라 피지 않으리라 그리고 구름도 嶺 넘어 오지는 않으리라
나 혼자 남으리라 남아서 깊은 산 산새처럼 노래를 부르리라 긴 밤을 새워 편지를 쓰리라
민영 시인 / 이 가을에
가을이 깊다. 이역만리 먼 곳에서 날아온 새들 갈대밭에 내려앉아 지친 몸을 쉬고, 이슬에 젖은 연분홍 꽃잎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깃을 여민다.
생각해보아라 얼마나 모진 세월을 살아왔는지, 이제 너에게 남겨진 일은 그거칠고 사나운 역사 속에서 말없이 떠난 이들을 추념하는 일이다.
아,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이냐 끝까지 올곧고 아름다웠던 젊은이들, 시월 상달에 이 눈부신 서릿발 치는 푸른 날빛 속에서 어디로 가야 만나볼 수 있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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