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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원 시인 / 그리운 황태
사랑, 아직도 더 말라야 하느냐? 낮엔 햇볕에 탈진한 채 마르다가도 밤이면 그리움에 꽁꽁 머는 대관령 덕장 황태처럼 바다를 생각하면 촉촉이 젖어드는 몸뚱이 유명하던 날씬한 몸매도 젊은 날의 꿈도 잊어버린 채 얼마나 마르고 말라야 사랑 남은 한 가닥마저 잊을 수 있을까? 이 밤, 그대 그리움에 또 다시 젖는다.
-시집 <코끼리 무덤> 2015-
이희원 시인 / 깃털
저기 하늘을 놓친 깃털이 있다 족쇄 채워진 새의 일부가 있다 내가 지상으로 내려온 지는 수억 년이 넘었다 내가 이렇게 묶인 지도 한 1만 년은 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말의 노예가 아니었다 내가 보고 온 하늘과 태양을 노래하고 싶었다
나를 먹물 속에 담그거나 언제부터인가 내 몸에 먹물을 집어넣고는 내 몸에서 말즙을 짜내기 시작했다
어떤 기록은 왜곡의 산실産室이다 내 깃가지를 비틀어도 나는 그런 말을 토해낸 적이 없다
내 거처는 저 텅 빈 하늘이다 애초부터 나는 정착을 모른다 결국 나는 처음부터 새다
1만 개의 깃털을 핥아 가지를 곧추세운다 한때 만년필이었던, 말이었던, 깃털이 백지 위에서 다시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왜곡은 왜곡일 뿐이다
-시집『코끼리 무덤』에서
이희원 시인 / 기쁜 시정마試精馬*
나는 오늘 기쁘다. 드디어 그녀가 내 몸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역시 나의 매력은 집요함에 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스무 번 찍으면 된다. 뒷발길질쯤 하나도 매섭지 않다. 역시 계집은 예뻐야 한다. 까짓 발길질도 못 참고서야 어찌 사랑을 말하랴.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위대해지는 바다의 이치를 어찌 알랴. 프로는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사랑에 빠지려면, 한여름의 찌는 뙤약볕과 살을 에는 찬바람을 함께해야 한다. 홍어처럼, 식당 한구석에서 구정물을 뒤집어쓰고 푹푹 썩어갈 때 사랑은 발효한다. 모두들 지쳐 돌아갈 때 내 사랑은 빛난다. 허울 좋은 참사랑 따위에 빠져 갈급해져선 안 된다. 이만한 사랑도 내겐 너무 과분하다. 종마가 올 때까지가 나의 임무다. 미친 듯이 사력을 다해 절규해도 소용없다. 사랑은 원래부터 프로그래밍 속에 없다. 그녀의 행복을 빌며 발걸음을 돌려야겠다, 히이잉
-시집 『코끼리 무덤』 (작가세계, 2015) 중에서
이희원 시인 / 생각분양*
책보자기를 들고 전차를 타던 모습이 떠올랐지
나는 어제처럼 컴퓨터 다운로드 키를 눌렀어, 보자기로 싸려는데 팔에 경련이 왔어.
그것을 양탄자처럼 타고 날고 싶었는지 몰라 그때는, 보리밭 길에서 깜부기나 씹으면서
보자기는 책만 싸는 건 아니에요 보자기엔 당신의 뒷모습과 욕망을 코끼리를 잡아먹은 보아 뱀까지 싸두는 곳이에요
방송에선 모델하우스처럼 자꾸만 뭘 싸주네요 우린 보자기만 준비하면 되겠지요 나는 그것이 커다란 유방을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그 속에 젖을 가득가득 채운, 걸신들린 입들이 주둥이를 내미는 곳
그 속에 들어가 가끔은 한 숨 폭 자고 싶었어요 꿈틀꿈틀 커져라,내 보자기 공중을 나는 저보자기 날 보고 자꾸 웃네요.
*김순호님의 에세이집을 읽다가
ㅡ「시인정신」 2016 봄.여름 합병호
이희원 시인 / 한 수유須臾*쯤
눈이 왔고 그녀가 갔지, 그날은 첫눈이 내렸고 우린 강이 끝나는 곳에서 언 강을 보고 있었지, 사랑이 시작되던 상류 쪽으로 새들이 날아가고 있었지, 첫눈이 왔고 주파수가 다른 언어로 소통하는데 지쳐갔지, 기껏 헤어져야 할 이유를 찾는다면 쳐진 눈 밑 주름살 정도, 첫눈이 왔고, 그녀가 떠나야할 이유는 너무 많았지, 들쑥날쑥한 내 서툰 문장에 대하여, 빳빳이 서지 못하는 은유법에 대하여, 빈약한 턱수염에 대하여 내 몸속을 한 바퀴 돌아 나온 건방진 내 말투 까지, 우린 서로 너무 가까이에서 많은 것들을 보느라 지쳤는지 몰라, 첫눈이 왔고, 데스크 다이어리에 새 달력을 갈아 끼울 시간도 없었어, 턱수염이 다시 자랄 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는지 몰라, 그 시간만큼 바라볼 푸른 하늘도 필요했는지, 첫눈이 왔고 눈 팔매를 피하다 막다른 골목에서 부딪힌 서로의 민낮들, 환히 드러나는 실체들,
첫사랑은 왜 잘 뭉쳐지지 않는지 몰라.
*한 수유須臾 : 중국의 과거 시간단위 한 수유는 48분이고 그 시간은 턱수염이 다시 자라는 시간이고 하루는 30수유임.
이희원 시인 / 혀 속의 검은 혀
언젠가 나는 그녀의 혀 속의 검은 혀를, 또는 당신의 혀 속의 검은 혀를 만난적이 있다
나는 그녀의 혀 속에다 내 검은 혀를 디밀었고 당신의 혀 속에 내 검은 혀를 휘둘렀던 적이 있다 사람들이 게걸대며 종 주먹을 날리던 싸락눈이 흩날리는 초겨울 밤이었던가
수많은 혀들과 혀들이 신호등을 따라 오가고 있다 불쑥 검은 혀들이 어디선가 튀어나와 인도로 돌진한다 사람들이 놀라 뛴다 포장마차의 알전등이 누런빛을 뿜고 있다
그들 중 누구는 꼬리가 살아났다며 밤새 꼬리를 세웠고 어떤 이들은 가끔 마스크맨처럼 검은 혀를 썼다간 벗기도 했다
그대는 내 검은 혀에 대해 불만족하다 왜 늘 그 모양 야요? 하고 묻는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던가? 출근길에 스쳤던 강물처럼 검은 혀들도 어디선가 흘러와서 그렇게 흘러가는 것인지 모른다
-계간 『시와 세계』 2010년 여름호 발표
이희원 시인 / 당신의 별사別辭
당신의 감기는 눈썹을 위해 그쯤에서 성을 쌓았을까, 끝없는 지평을 달려 계절을 앞질러 왔다. 카이뻥에서부터 내리던 눈이 콘냐까지 쫓아왔다. 당신과 나는 한번도 방울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칼바람이 불고 있었다. 지독한 겨울이었다.
달빛을 잡아다 책상 위에 걸었다. 그림자가 지나가듯 네가 다녀갔다. 너를 붙잡기 위해 밤을 밝히던 날들이었다. 어딘가에 세상을 걸기엔 청춘이 아깝다고 느끼던 날들이었다. 저만치서 코웃음을 치면서 네가 지나갔다.
소금과 여물은 풍요로웠다. 발굽 아래론 융단 같은 밀집이 지친 다리를 위로하고 있었다. 아무도 내일을 걱정하지 않았다. 달은 마방에서 떠서 마방에서 졌다. 마방은 모든 것들을 포용했다. 우리의 죄악까지도
우리의 식탁은 늘 풍요했다. 메르지멕초르바 숲과 바케트는 그득했고 양피지는 두루마리로 감겨 있었다. 붓들은 당신이 어서 와 붙잡아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은 개나 물어가라지, 은촛대가 하얗게 밤을 밝히고 있었다.
나귀의 방울소리가 아침을 깨웠다. 갈퀴를 고르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황제는 빨리 떠날 것을 명했다. 시간이 돈이 되던 시대가 왔다. 어차피 당신은 떠나야 한다. 그랜드바자르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광야를 달리던 바람이었을까, 아니 한 천 년쯤 눈 덮인 천산을 오르내리던 바람이었을까 바람은 가끔 마방을 기웃거렸다. 잠시나마 너를 가둘 수 있다는 생각에 즐거웠다. 너는 빗소리를 따라 총총 떠나갔다.
말똥 냄새가 마방을 넘는다. 떠나면서 벌써 그립다. 마방은 문을 열었다 닫을 뿐, 당신을 영원히 가두지는 못한다. 마방을 나서면서 처음, 당신이라는 마방을 생각했다. 아니, 당신의 이름 뒤에 묻어나는 슬픔을 생각했다. 눈에 눈물이 그렁댔다.
밀밭의 하늘 위로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당신이 빗소리를 따라 흩어질 때, 나는 밭고랑을 뛰며 쓰러지는 밀대를 세우고 있었다. 콘냐의 밀밭은 하늘만큼 넓었다. 내 입술은 너무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랜드바자르는 실크로드 끝에 실제로 존재했다. 그곳에서 기다릴 황금과 계집에 대한 꿈으로 마바리꾼들은 가슴마다 체리를 붉게 피우고 있었다. 마라마라 해협을 건너면 그곳까지는 불과 하루꺼리다.
접신의 기억은 멀다. 언젠가 콘냐의 마방에서 만났을 마바리꾼에 대한 기억처럼, 작은 수첩을 꺼내들고 세재의 주막에서 당신에게 고작 편지 한 줄을 띄운다.
-「마방馬房」, 『시와 미학』, 2012.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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