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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혜 시인 / 들끓는 빨강에 대한 변명
새로울 것 없는 해 아래 사막모래로 집짓자는 인간 이야기야 왁자하게 들끓는 뒤풀이에 묵은지갈비찜보다 더 벌겋게 침 튀기는 이야기지
시집해설서 청탁이 왔어 오랜만에 언터처블에서 온 청탁이라 꼼꼼하게 원고를 읽고 전화했지 언터처블이라 높은 기대로 거듭 세 번 읽었습니다. 마는, 아무것도 잡을 게 없네요! 했지 아, 그게 말이야, 전 집행부가 내주기로 했는데 미루고 미루다 더 미룰 수 없게 돼서 말이야…. 저에게는 어쩔 수 없이 밀려나는 원고만 줍니까? 했지. 아, 고까워 말고 언터처블 청탁에 원고료도 같은데 뭘 그러나. 삼류에게도 진정성이라는 게 있잖은가, 진정성! 그걸 좀 찾아 써달라는 거지
썼는지 안 썼는지 알 수 없는 이야기야 언터처블을 터처블해보려 아우성치는 인간 이야기야 졸아가는 묵은지갈비찜보다 더 가슴 바작거리는 이야기지
이성혜 시인 / 문, 그리고 문
전철역을 향하다 멈칫한다. 입구가 사라졌다. 신축 중인 역사驛舍는 자주 입을 꿰매고 바뀐 입구를 찾다 철로변 무궁화를 보았다. 이 소령네 대문은 자주 위치가 바뀌었다. 엄마, 왜 대문을 자꾸 바꿔? 대문 위치가 나빠서 복이 나간대. 꽃은 복이 나가서 옮겼어? 대문이 바뀌니까 옮겼지. 뒤란으로 돌아간 계집아이. 무궁화 꽃 피고 뒤란 언덕에 버려진 색동대님을 주우려다 몸이 굳는다. 살아 구불거리는 대님. 그때의 불안은 구불구불 자라나 사기를 당하고, 동네에서 선망 받던 빵공장을 삼키고, 무궁화 꽃숭어리 시푸르게 떨군 집까지 먹어치웠다. 먼지처럼 분분한 어제와 내일을 싣고 달려온 화사가 입을 벌린다. 그때 긴 몸 훌쩍 빠져나간 화사는 어느 문으로 들어갔을까
- 『시인동네』 2018-1월호
이성혜 시인 / 샤랄라랄라, 자궁들의 피크닉
초록모자 리본이 한껏 날려요, 샤랄라랄라 피크닉가요
파헤쳐졌어요 뿌리가 구더기가 뱀이 깊은 어둠이 시간이 한 체취로 내던 파동, 마저, 잊은, 절대 고요가. 기억의 일부일까, 먼 시점에서 지금까지 남아있던 어느 순간일까요? 햇살 부스러기 닮은 무언가가 반짝 깨어나다 스러져요
‘이장 장례대행’ 깃발이 한껏 날려요, 샤랄라랄라 피크닉가요
생식 잃은 뿌리들이 입을 벌린 자궁에 담기고 있어요 00어묵 처음처럼 삼다수산 망고망고 친환경쿠키 큰사발탕면… 고구마 구근처럼 줄줄이 묶여서 봉고차 타고 신나게 달려가요
손 없다는 윤달에 손이 한껏 밀려요, 샤랄라랄라 피크닉가요
후미진 통로에 병아리떼 종종종 줄을 섰어요 도장 찍힌 이름표가 터억 턱 붙어요, 26, 27, 28, 29… 한 시간 삼십분 아니에요, 삼십분으로 충분하답니다
30분 불세례로 영원한 피크닉족, 샤랄라랄라 피크닉 가요
이성혜 시인 / 배려 햇살의 잔광이 계절의 그늘 속으로 스며든다 갈 길 준비하는 은행나무 길을 지나다 물들지 못한 부류를 만난다 햇살을 쫓으려다 놓친, 무리에 속하지 못한 부류는 그림자에 젖어 있다 밝은 곳에 서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그늘 문이 열리고 무리가 들어서자 자신의 옆 좌석을 두드리며 여기에 앉으세요, 배려예요, 함께 앉아야지요 빈 곳 많은 좌석에 주저하던 발길 하나 주춤주춤 자리 잡자 은행잎처럼 우수수 쏟아지는 질문 천진하고 새하얀 관심에 옆 좌석은 감내할 것이 많다 어색한 동행이 몇 차례 빠르게 떠나고, 습득된 배려를 권하는 이십 대 중반 여자의 눈에 베푼 자의 만족이 일렁인다 함께 황금색으로 채색되지 않은 채, 여전히 맑고 푸르게 남아 있는 잎
이성혜 시인 / 허공이 허공을 빠져 나간다
굵은 업구렁이가 대청 밑에 하루 밤낮 엎드렸다 사라진 후, 남편 상을 치루고, 영문 모르게 전답이 타인의 손에 넘어가고 재산을 다투던 자식들이 떠난 지 수십 년 된 집,
새앙밭 대나무밭 텃밭, 마당에 접시꽃 칠보꽃 장독대가 바지런한 손끝에서 윤기 나는 숨을 쉬고 그네 기척에 뒤란 우물이 퐁퐁퐁 찬물을 솟아내고 무너지다만 잠사에선 끊임없이 미물들이 탄생하는 집,
심전도 모니터가 고요에 들고, 구근의 줄기처럼 매달린 호스들이 제거된, 삶과 죽음이 엉겨 스멀거리는 뜬 삼일이다
그네가 집안 구석구석을 돌며 남겨진 흔적을 걷는다 찬간 희미한 손때, 벽장구석 마른쥐똥에 맺힌 한숨, 헛간에 간간 뱉어 놓은 생기 잃은 탄식, 뒷간의 힘든 호흡 한 점, 문간에 비친 그림자까지 걷어 안고 팔십년 풍상 실린 정지간을 서성인다
그녀가 발소리와 그림자까지 걷어간 집이 또 다른 허공이다
-(2012 <시와사람> 가을호.)
이성혜 시인 / 습작도시
낯선 지명 위를 흐르는 동안 너는 위험을 감지한 말미잘처럼 촉수를 세우고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등대모텔 객실 -말이 좋아 모텔이지 민박수준이다. 따뜻한 방바닥에 뭉텅뭉텅 피어난 꽃숭머리를 온몸으로 뭉개다 밑 빠지는 봉지처럼 와르르 쏟아져 내린다
벌교 지나다 외할머니와 살던 마을 표지석을 봤어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데려다 줘서 몇 년 살았어
우리 엄만 작은 옷을 입고 살았다 겨드랑이와 배꼽이 다 드러났으니 늘 서늘했을 거야
익숙해진 손가락질이었을 텐데 그날은 참지 못했다네 피대에 홍매가 만개했을 방앗간! 여전히 있을까 왈칵, 40겹 담장을 넘어 오는 투명한 구체 고해성사를 듣는 명치가 뻐근하다 당황해 하는 방안공기를 이해한다는 듯 다독여야 하나? 낯선 도시의 밤바다가 주는 분위기 탓으로 돌려야하나? 무심하게 터덜거리 는 자전거를 부러워하다 문득, 귀 낮은 새가 되어 어둠 속으로 날아갔 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행! 생각지 못한 순간 수천 겹 감싼 습작의 지층을 문득 열어 보이 는 통로가 아닐까)
이성혜 시인 / '이런 날'에 하는 변명
한적한 골목에 제자리를 톡탁이는 시계와 흐드러진 넝쿨장미 중년 밴드 코사지를 모아 장미다발 엮었다네 초대한 나비와 무당벌레가 도착하기 전, 예서제서 날아드는 장미여관 신음에 귓바퀴 간지럽고, 끈적끈적 휘감기는 핑크 벨벳, 불온한 블랙뷰티, 철없는 옐로킹, 주술사의 블루로즈, 반항의 아방가르드 천지에, 천지가 장미로 개락이 나버렸다네
병원에서 7개월을 보내며 16회 항암치료를 받아야하는 환자를 지켜 봤네 배낭을 메고 홀로 오가며 히말라야 12봉을 정복했네 팔순을 바라보는 엄니가 응원했지만 13봉에서 하산하지 못했다네 그녀의 등정기를 써보려 했네 가슴에 안고 굴리고 부풀리는 사이 비슷한 작품들 발표돼버렸네 머물어물거리다 내 그럴 줄 알았다네
촌로가 글을 깨치더니 시를 쓴다네 자식이 자식이 아니라 손님이다 태풍으로 우루루 떨어진 깻단이 자식 다친 것보다 더 아팠다 목련을 꺾어 고마운 마음을 비닐봉지에 담아왔지만 선생이 목련에 붙은 벌레가 무서워 던져버렸다는, 시인 S가 들려준 경험담을 나열해놓고 엉덩이 붙일 사랑방 하나 만들어버린 날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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