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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태수 시인 / 패랭이꽃이 깊다
"작지만 범접하기 어려운 하양" 이 표현은 흰 패랭이꽃을 본 화가한테서 나왔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색이라면 잴 수 없는 색의 깊이 때문인가. '깊이' 없는 게 뭘까. '존재'는 깊이 없이 있을 수 있나. 당신의 깊이는 어느 정도일까 폰에 찍힌 꽃을 다시 보니 도저한 고독이 빛나고 있었다. 아내가 식사 준비하고 있을 때 부딪치는 식기들 소리에서도 메아리가 겹겹이 번지는 것 같았지 거둘 수 없는 동심원들로 울려 퍼지는 게 아닐까 했지. 얼마나 먼데서 이 순간들이 왔을까. 눈 밝고 귀 맑으면 짐작이 될까 뭐하세요? 국그릇 좀 받아주세요. 아, 알았어요. 찰나에 돌아왔다. '범접하기 어려운 심연이 툭 깨져 순식간에 돌아온 것이다.
설태수 시인 / 섬
파도치는 사연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섬이 차마 떠나지 못하는 걸까. 밤에도 몰래 떠나지 못하는 걸까. 끝없는 사연들을 듣느라고 저렇게 떠나지 않고 있다. 거친 파도엔 눈물 훔치면서도 도저히 떠날 기미가 없다
설태수 시인 / 샘
샘이 터져 나온 물길은 땅 속의 새가 날아오른 길이다 바위도 막지 못하는 물로 된 새의 길이다
-시집 <말씀은 목마르다>에서
설태수 시인 / 점
따끔, 모기한테 종아리가 물렸다. 잘 안 보이는 점에서 부어오른다. 시작을 알리는 점. 쌀알에 수박에 곡물마다 그것을 받드는 점이 있다. 점같은 항문에 사람 동물이 얹혀 있다. 지구 태양이 별들의 궤도가 점이다. 까망 초록 파랑 분홍 어떤 펜이든 콕, 점을 찍으면 영원은 바들바들 거릴 것이다. 굵직한 뱀장어 대가리에 송곳꽂히면 몸 전체가 파르르 파르르 하듯이. 숨 쉬는 것들 노을 뿌리고 비를 적시네. 물린 자리가 아직 얼얼. 이 관성 끝날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안 보이는 것이 다행이기도 하다.
설태수 시인 / 세잔에서-호시탐탐, 파랑
비바람에 젖은 정류장 의자, 다리 불편한 노인이 앉아 버렸다. 버스 뒷좌석에선 통화 끝에 또 보자는 소리. 낭자한 은행잎들, 밟혀도 노랑을 잃지 않았다. 붕어빵가게 주인은 철시, 호시탐탐 늦가을 비구름,
붙잡을 수 없는 무심에도 그는 파랑색을 칠했을까. 당신과 나 사이는 얼마나 파랗고 파랄까. 잠결에도 지워지지 않을 빛깔 날리는 잎들실하게 받들겠지. 메울 수 없는 간극들 풍우상설에도 푸르디푸르겠지.
-시집 <빛들의 수다>에서
설태수 시인 / 코끼리
코끼리가 現象에 들어선 것은 그럴싸해. 천지사방 변화라는 것이 전부는 안 보여서 코끼리를 끌어들였으리. 잎들 몸짓 까치 꿩 까마귀 소리 살구 맛에도 그때마다 딱 들어맞는 표현은 없으니. 코끼리 처음 봤을 때 입이 잘 떨어지질 않아 보기만 했었지. 현상이 그런 점에서 유사. 긴 세월 산천과 사람들 접했는데 뭘 보았는지 도대체 입 뻥긋하기가 어렵네. 그러니까 코끼리야. 詩가 굶주릴 이유는 없다는 거야. 코끼리가 현상계를 가로지르는 형국이니까. 문득 듣고 싶은 라흐마니노프 그 광야에도 코끼리는 가고 있겠네. 큰 귀 펄럭이면서 가고 있겠네.
설태수 시인 / 사랑을 받들고 있는 것은
꽃을 받들고 있는 것이 외줄기이듯 사랑을 받들고 있는 것은 외로움이다. 사랑은 무아경이니 내가 줄기 되어 그대를 꽃 피우는 경지. 어둠을 발효시키고 적막을 지워버리며 암흑 속 수맥을 찾아 꿈결에도 시린 뿌리 내리는 맹목. 외로움이 실할수록 깊어가는 사랑. -시집 <소리의 탑> 천년의 시작,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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