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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시인 / 물속 수도원
기도는 기도라고 생각하는 순간 흩어진다
나는 물가에 앉아 짐승이라는 말을 오래 생각했는데
저녁은 죽은 개를 끌고 물속으로 사라지고 목줄에는 그림자만 묶여 있다 개보다 더 개인 것처럼 묶여 있다
그림자의 목덜미를 만지며 물속을 본다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그 끝엔 낮은 입구를 가진 집 물의 핏줄 같은 골목을 따라 모두들 한 곳으로 가고 있다
마음껏 타오르는 색들, 오로라, 죽은 개 나는 그림자에 대고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물 위에 드리워진 나뭇가지 얼굴은 수초로 가득한 어항 같아!
나는 땅 위에 작은 집을 그리고 그 안에 말없이 누워본다
이마를 짚으면 이마가 거기 있듯이 이마를 짚지 않아도 이마가 거기 있듯이
안희연 시인 / 스페어
진짜라는 말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 같아 단 하나의 무언가를 갈망하는 태도 같은 것 다른 세계로 향하는 계단 같은 건 없다 식탁 위에는 싹이 난 감자 한 봉지가 놓여 있을 뿐 저 감자는 정확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싹이 아니라 독이지만 저것도 성장은 성장이라고, 초록 앞에선 겸허히 두 손을 모으게 된다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을 바라본다
하지만 싹은 쉽게 도려내지는 것 먹구름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흐린 것은 흐리고 도려낸 자리엔 새살이 돋는 것이 아니라 도려낸 모양 그대로의 감자가 남는다 아직일 수도 결국일 수도 있다 숨겨 놓은 조커일 수도 이미 잊혀진 카드일 수도 있다 나를 도려내고 남은 나로 오늘을 살아간다 여전히 내 안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내가 나머지의 나머지로서의 내가
안희연 시인 / 밤 가위
가위는 가로지르는 도구다. 가위는 하나였던 세계를 둘로 나누고 영원한 밤의 골짜기를 만들고 한 사람을 절벽에 세워 두고 목소리를 듣게 한다. 발아래, 당신의 발아래 내가 있으니 그냥 돌아가지 말아요.
절벽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가위는 있다. 그는 밤가위로 밤을 깎는다. 밤의 껍질은 보기보다 단단하다. 밤으로부터 밤을 구해내려면 밤도 감수해야 한다. 피부가 사라지는 고통을. 그래도 조각 나지는 않는다. 밤 가위는 밤의 둘레를 따라 천천히 걸어 하나의 접시에 당도한다. 당신 앞에 생밤의 시간이 열릴 때까지.
당신 발밑으로 이유 없이 새 한 마리가 떨어진다면 제가 보낸 슬픔인 줄 아세요. 나는 아직 절벽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안희연 시인 / 주물
불주전자를 들고 다니는 손이 있다 얼어붙은 영혼의 정수리에 콸콸 불을 쏟고 사라지는
나는 매일 밤 그를 찾으러 다닌다 다신 나를 깨우지 마세요 나에게 진짜 죽음을 주세요
간청해도 얼굴은 녹아내린다
아침은 뭉개진 얼굴을 갖는 시간 의미를 찾아보라고 하루라는 틀 안에 갇힌 우리
굳지 않는 하루는 없다 서둘러 발목 밖으로 발목을 꺼내야 한다
어떤 날은 장미 가시 끝에 맺힌 물방울 어떤 날은 불타버린 집 나도 모르는 내가 되어서
매일 더 낯선 곳에서 멈춰 선다 밤은 얼굴을 부정하기 위한 시간
완벽한 악몽을 제작하려는 신의 담금질은 멈추지 않는다 밤새도록 귓가를 맴도는 망치질 소리 물속으로 머리채를 끌고 가는
안희연 시인 /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 적당한 햇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 속에서 한참 걷다보니 움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였다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토끼 한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했다 그뒤론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언덕은 자신에게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토끼일까 쫓기듯 쫓으며 나는 무수한 언덕 가운데 왜 하필 이곳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했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안희연 시인 / 표적
얼음은 녹기 위해 태어났다는 문장을 무심히 뱉었다. 녹기 위해 태어났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녹고 있는 얼음 앞에서 또박또박 섬뜩함을 말했다는 것 굳기 위해 태어난 밀랍초와 구겨지기 위해 태어난 은박지에 대해서도
그러려고 태어난 영혼은 없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에 밟혀 죽은 흰 쥐가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흰 쥐 한 마리 흰 쥐의 가여움 흰 쥐, 열 마리 흰 쥐의 징그러움 흰 쥐, 수백 마리 흰 쥐의 당연함
질문도 없이 마땅해진다 흰 쥐가 산처럼 쌓여 있는 방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잘 수 있게 된다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거라고 어른이 된다는 건 폭격 속에서도 꿋꿋이 식탁을 차릴 줄 아는 것이라고
무엇이 만든 흰 쥐인 줄도 모르고 다짐하고 안도하는 뒤통수에게
넌 죽기 위해 태어났어, 쓰러뜨리기 위해 태어난 공이 날아온다 당연한 말이니까 아파할 수 없어, 불길해지기 위해 태어난 까마귀들이 전신주인 줄 알고 어깨 위에 줄지어 앉기 시작한다
안희연 시인 / 폭풍우 치는 밤에
나무가 부러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수호신처럼 마을 입구를 지키던 나무였다
사람들은 부러진 나무를 빙 둘러싸고 서서 각자의 시간을 떠올린다 소망과 악담, 비밀을 한데 모으면 한그루의 나무가 되었다
무엇이 나무를 부러뜨린 거지? 기껏해야 밤이었는데 우리가 미래나 보루 같은 말들을 믿지 않았던 게 아닌데
슬픔의 입장에서 보면 나무는 묶인 발이다 그제야 주먹을 꽉 쥐고 있던 나무가 보였다
바람이 나무를 흔들었다고 생각해? 나무는 매일같이 바람을 불러 자신을 지우고 있었어 발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마음이 매달려 있어서
기억의 입장에서 보면 나무는 잠기거나 잘린 얼굴이다 간절히 씻고 싶었을 얼굴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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