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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만진 시인 / 아버지 생각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5.
박만진 시인 / 아버지 생각

박만진 시인 / 아버지 생각

 

 

막걸리를 보면 아버지 생각이 절로 난다

주전자 들고 술심부름 가던 생각이 난다

 

나는 왜 술에 취한 아버지를 미워했을까

 

수업료를 몇 달째 밀린 사유로

몇 차례 교무실에 불려 다니고

나머지 화장실 청소를 한 것이 뭐 그리 대수인가

 

읍내에 나가 목이 마르고 마를 때에

애오라지 걸쭉한 막걸리 한잔 자셨을 게다

 

외상 술 한 잔 또 한 잔,

시금시금한 감치주저리 안주 삼아 자셨을 게다

 

젓가락 장단에 육자배기 부르다가

갈지자 걸음으로 집에 돌아올 때면

만고강산 단가를 부르시곤 했다

 

나는 왜 술에 젖은 아버지를 멀리했을까

 

찢어지게 가난했던 아버지의 캄캄한 어둠을

철없던 나이라서 이해하지 못했었다

 

읍내에 나가 배가 고프고 고플 때에

애오라지 텁텁한 막걸리 몇 잔 자셨을 게다

 

-시집 <꿈꾸는 날개> 중에서

 

 


 

 

박만진 시인 / 먹물

 

 

가방끈이 좀 짧기는 해도

이래저래 먹물이 좋이 먹었다

학창시절 그후로는

벼루에 먹을 갈거나

붓글씨를 써본 적 없지만

서해바다 이웃한

중소도시에 살다보니

먹물을 지닌 주꾸미와

낙지를 이따금씩 먹곤 한다

봄 주꾸미,

가을낙지라고하지 않는가

문어나 뻘낙지를

즐겨 먹는다는 누군가는

그 먹물로 수묵화를 그린다고 하지만

먹물이 대가리에

그래그래, 머리에 들어있다

일찍이 저녁 시장에 다녀온 아내가

살짝 데친 주꾸미를

초고추장에 찍어먹자고 서둘며

가위로 머리부분을 잘못 잘라

터트려놓은 먹물이

흰 접시에 지천이고

지금 나는 그 먹물로

이 시를 쓰고있는 것이다

 

 


 

 

박만진 시인 / 서울행 버스에서

 

 

서울행 버스에 오르는데

맨 앞좌석에 앉은 낯익은 여인이

(기)좋은 일이 있어 올라가시나 봐요,(기)라고

인사말을 건네는 것이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기 그지없는데

치렛말 끝에 물음표,

치렛말 끝에 마침표가 숨어 있나

여인은 좋은 일이 있어 올라가나

그렇기 때문에 그리 말하나

즈음 들어 무료하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외손녀가 무척 보고 싶기도 하여

새벽 일찍 서울행 버스를 탄 것인데

서울에 가면 좋은 일이 생기려나

좋은 일이 좋이 지기다리고 있으려나

딸과 사위와 외손녀를 만나보고

다시 서산행 버스를 탈 때까지

끝내 좋은 일 하나 없으면 어쩌나

강남고속터미널 영풍문고에 들렀다가

로또 복권이라도 한두 장 사야 하나

언덕을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산길을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마냥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것뿐인데

어찌 서울에 올라간다고 하나

 

 


 

 

박만진 시인 / 무화과나무

 

 

무화과나무에 혹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

도깨비방망이를 가진 도깨비들이 저 혹을 정말 좋아하는지

개구쟁이 동네 꼬마둥이들이

실성한 비렁뱅이인 줄 알고 몇 차례나 돌멩이질을 해댔는지

넓은 앞마당 정원을 두고 짐짓 뒤란에서 춤을 추는지

모질고 사나운 시어머니 잔소리가

간장 된장 고추장 항아리를 일일이 시퍼렇게 참견하는지

볼 터져라 눈 흘기는 상추쌈노릇도 못하는 주제꼴에

깊은 밤이면 무화과나무, 왜 자꾸

바로 뒷집 창문으로 젊은 부부 잠자리를 얼씬거리는지

 

-<시향> 2009. 봄호

 

 


 

 

박만진 시인 / 다음 生에 나무가 되리라

 

 

이제껏 나는 네 귀 종이를

너무 헤프게 소모하였구나

시를 쓴다는, 시가 잘

풀리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끼적거려 꾸겨버리거나

발기발기 찢어

쓰레기통에 쑤셔박았다가는

측간 바로 옆에서

활활 불태우기 일쑤였구나

무럭무럭, 나는

다음 生에 나무가 되리라

네 귀, 하얀, 품 좋은 종이를

뜰 수 있는 나무,

그대 또는 다음 生에

뭇 사람이 칭송하여 일컫는

한 마리 七色鳥가 되어

그 가장 높은 가지 위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려므나

노래, 입곱 빛깔 노래를 듣고

나이테를 키운 먼 훗날

누군가가 분명 시인이 되어

그 하얀, 네 귀 종이 위에

보석 같은 시를 쏟아놓을지니

 

-계간 <시와시학> 2001,가을호

 

 


 

 

박만진 시인 / 사과

 

 

사과를 깎다 보면

사과의 껍질이 길이 되다

사과 한 알의 몸이

영영 사라질 것을 깨닫고

사과 한 알의 길이

툭 끊어지는 것이다

뱀처럼 똬리로 지켜 앉아

날름거리던 어릴 때의 궁기,

울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과를 능금이라 부르곤 했다

물론 나는 능금과 사과가

다르다는 것을 잘 안다

이즈음 치솟는 금값이의

금 자字때문만이 아니겠지만

사과라는 이름보다는

능금이라는 말이

좀 더 새콤달콤할 것 같다

방금도 은근슬쩍

능금을 건드려 본 말에

혀밑샘이 흥건해진다하다

어제의 사소한 잘못을

오늘 사과를 하려고 머뭇거리는

저 소녀의

발그레한 얼굴을 보아!

어쩌면 사과의 모양을 저리 닮아

또 다른 말뜻의

사과라 이름 붙였지 싶다

 

 


 

 

박만진 시인 / 바나나 할머니

 

 

한서요양원 한승혜 원장님이

봉숭아꽃 앞에서 꽃잎을 따며

요양원 할머니들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여 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아한다고 웃으시네

 

요양사 교육생들이 현장 실습 가면

손 한 번만 만져봐도 돼유,

아무도 안 오니 어쩐대유, 라고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씨 고운 할머니,

바나나 할머니가 계시기도 하지만

 

지긋하신 요양원 어르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은

그 많고 많은 먹거리 중에서도

청과물상회나 마트에서

손쉽게 살 수 있는 바나나라네

 

 


 

박만진 시인

1947년 충남 서산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수료. 1987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빈시간에』 『슬픔 그 껍질을 벗기면』 『물에 빠진 섬』 『마을은 고요하고』 『내겐 늘 바다가 부족하네』 『접목을 생각하며』 『오이가 예쁘다』 『붉은 삼각형』 『단풍잎 우표』 등. 충남문학대상, 충청남도문화상(문학부문), 충남시인협회상 본상 수상. 서안시문학회 회장 역임. 현재 계간『시향』 편집자문위원,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 한국시낭송가협회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