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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상진 시인 / 바닥이라는 말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5.
권상진 시인 / 바닥이라는 말

권상진 시인 / 바닥이라는 말

 

 

눈을 떴을 때 나는 바닥에 닿아있었다

흉물스런 바닥의 상징들로 각인된 팔과 이마는

오늘, 또하나의 슬픈 계급을 얻는다

 

삶의 바닥에 무릎 꿇어 본 적이 있다

하루의 인생을 허탕치고 돌아와

단단하고 냉랭한 바닥에 무릎을 주고 손을 짚으면

이런 슬픔에 어울리는 습기와 냄새 그리고

허공의 무게가 뒷등에서 자라곤 했다

 

심해의 물고기들처럼 납작해질 용기가 없다면

중력을 향해 솟구쳐야 한다.

마른 땅을 움켜쥐고도 몇 번을 다시 살아내는 나무처럼

시든 무릎을 세우면서

사람의 가장 슬픈 자세를 풀고 있는

나도, 이제 바닥이라는 말을 알아들을 나이

 

달력은 벽에서 전등은 천정에서 화분은 베란다에서

저마다의 자세로 각자의 바닥을 해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절망은

단단한 계단의 다른 이름이 된다

 

 


 

 

권상진 시인 / 백색왜성

 

 

 

 외래병동 종양내과에는 한 달에 한 번 별 부스러기를 처방해주는 의사가 있다

 환한 별 조각들만 골라 오래 품었다가 온기가 돌면 정문 앞 약국에 맡겨 두는 사람

 

 어둑한 CT 사진 속에서 환하게 번져가는 암 덩어리, 성운처럼 신비롭다

 우주가 점점 어두워져 가네요. 함께 밤하늘을 응시하던 의사가 담담하게 말한다

 

 약사는 하루 세 번 식후 30분에 굵은 동그라미를 치고 그 위에 다시 별 하나를 그려 넣었다

 오늘부터 먹고 싶은 것 맘껏 먹어라 말해주는 의사가 이상하게 고맙더라는 농을 약값에 얹어 내밀고 별상점 문을 닫는다

 

 색깔 고운 별들이 소복하게 모여 있는 봉지를 다락에 올려두면 한 달 내내 별이 돋는 어머니의 방

 

 끼니때가 가까워오면 먼저 밥을 먹는다 밥은 별의 전채 요리, 별 봉지를 뜯고 물 한 모금으로 별을 씻 어 넘기면 피가 도는 곳 어디든 녹아드는 별 부스러기들

 

 고향집 하늘에는 밤마다 백색왜성이 뜬다

 별 먼지들이 어두운 곳에 쌓여 힘껏 빛을 보태보지만 어제보다 어둡고 어제보다 식어가는 하얀 별

 

 


 

 

권상진 시인 / 술값은 내가 냈으니

 

 

일주일에 여섯 번 그는 술을 마시고

나는 몇 줄의 시를 적는다

고작 카톡 메시지나 식당 메뉴판 정도가

하루에 읽는 활자의 전부였지만

그는 술을 마시면 시를 뱉었다

은유에 가두지 않는 아름다운 직설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기분들

삶의 늪에서 온몸으로 건져 올린 싱싱한 언어들을

선술집 구석자리에서 웃음과 눈물로 변주시킨다

 

내가 시 속에 가둔 문자들이

종일 켜놓은 모니터에 매미 허물처럼 붙어있거나

눈만 껌벅이며 뒷말을 더듬거릴 동안

빈병 너머로 흩어지던 그의 입담들

나는 길바닥에서 운 좋게 만난 동전처럼

두리번거리며 그의 말을 꾹 밟는다

몰래 주워 묻은 흙을 털어내고

말더듬이 문장 뒤에 슬쩍 끼워 넣는다

술값은 내가 냈으니 표절은 아니다

 

-계간 『한국동서문학』 2021년 겨울호에서

 

 


 

 

권상진 시인 / 집밥

 

 

혼자 먹는 밥은 해결의 대상이다

 

두어 바퀴째 식당가를 돌다가 알게 된 사실은

돈보다 용기가 더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

 

매일 드나들지만 언제나 마뜩잖은 맛집 골목을

막차처럼 빈속으로 돌아 나올 때

아이와 아내가 먹고 남은 밥과 김치 몇 조각에게

나는 낯선 식구이지나 않을는지

 

늦을 거면 밥은 해결하고 오라는 아내의 목소리가

걱정인지 짜증인지

가로수 꽃 점이라도 쳐보고 싶은 저녁

 

불편한 약속처럼 나를 기다리는 골목 분식집

연속극을 보다가 반갑게 일어서는 저이도

누군가의 아내이겠다 싶어

손쉬운 라면 한 그릇에

아내와 여주인을 해결하고 나면

어느새 든든해 오는 마음 한켠

 

아침은 굶고 점심은 구내식당

저녁 내내 간절하던 집밥은

그래, 쉬는 날 먹으면 된다

 

 


 

 

권상진 시인 / 당신이 먼 집에 있어

 

 

남해 지나 하동 가는 길

바다가 연신 차창을 기웃거리고

느닷없이 길 위로 뛰어드는 파도소리에

놀란 브레이크 등이 해국처럼 꽃잎을 펼쳤다 접는다

 

'남해바다와 노을'이라는 간판을 걸었지만

그것들 다 안으로 들일 수 없었는지

건어물 몇 가지만 엉성하게 펼쳐놓은 상점

주인은 오솔길 끝자락에 바다 한 귀퉁이를 묶어 절벽 아래에 던져 놓았고

파도가 일렁일 때마다 굽은 길이 느슨해지거나 다시 팽팽해졌다

 

저녁의 해변에서 노을을 면사포처럼 쓰고

나에게로 밀려오던 당신이 먼 집에 있어

까치밥처럼 남은 몇 장 지폐로 바다와 노을을 셈하고 돌아설 때

주인은 겹겹이 밀려온 파도의 낱장으로 곱게 싼 멸치를 덤으로 내주었다

 

창을 열어 노을을 바른 저녁과 파도소리를 한 짐 싣는다

바퀴가 덜컹일 때마다 거울에 비친 뒤가 붉게 출렁거려서

더딘 길이 자꾸만 굽어진다

 

늦은 밤 멸치를 우려내 국수를 삶는 여자에게

품었던 바다와 노을을 넌지시 내민다

여자는 잠시 붉어지더니 저만치 돌아서서 펼쳐 읽는다

좀체 꺼내놓지 않던 어떤 말이 밀려갔을까

여자, 돌아선 채 돌섬처럼 꿈쩍하지 않는다

 

 


 

 

권상진 시인 / 테트리스

 

 

다섯 평 원룸에 삼대가 삽니다

서로 살을 맞대는 일이

이 방에선 오히려 도덕적입니다

 

필요한 건 거의 다 있어요

꼭 필요하지 않은 게 없을 뿐

우아하게 놓여있지 않을 뿐

 

딱 추워 죽지 않을 만큼, 딱 더워 죽지 않을 만큼

비좁은 계절은 독특했지만

봄과 가을이 그 사이에 한 번씩 있다는게 어디예요

 

어쩌다 일요일

할머니의 낮잠이 가로로 눕습니다

아이들 숙제는 세로로 엎드리고

엄마는 하릴없이 동네를 걷습니다

경계는 언제나 접점 입니다

 

바닥에는 서열이 있습니다 혹은 없습니다

할머니 이부자리가 깔리고나면

우리는 나이순으로 혹은 귀가 순으로 배치됩니다

매일 새로운 모양으로 완성되는 가족은

밀려난 옷걸이와 모로 누운 밥상이 있어서

언제나 안심입니다

 

방을 집이라 부릅니다

가끔 틈이 생기는 날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 집에다가

다시 칸을 지를 순 없잖아요

 

 


 

 

권상진 시인 / 창녀와 어느 가장과 나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각자의 바닥에서 절망을 배우지만

바닥에도 격이란 게 있어

밑바닥이란 말이 시나브로 생겨났다

 

울음 없는 슬픔과 울어도 눈물이 없는 슬픔 눈물에 그늘이 없는 슬픔

질량이 다른 절망들은 마침내 가장 아래로 고여

밑바닥 인생의 발목은

늘 찰랑이는 슬픔에 잠긴다

 

어느 뒷골목에서 만났던 어린 창녀의 벗은 뒷등을 말없이 다독이거나

25층 옥상에서 금새 보았던 앞집 동갑내기 가장의 낯빛을

 

평온한 자세로 받아 안고 있는 따듯한 수평 앞에서

..나는 행복의 혐의가 너무 짙다

 

살면서 한번쯤은 만나게 될 것 같아서

바닥에 가만 손을 짚어본다

깜깜한 그곳에 얼비친 낯익은 이가 내 손을 덥석 잡는다

 

계절의 고비마다 고뇌에 찬 색감으로 돌아오는 낙화와 낙엽들을

바닥 저 밑에서 수습하는 뿌리처럼

창녀와 어느 가장과 나는

찰랑이는 슬픔을 지나 잠시 잊혀두었던 본래의 그들과

지금, 만나고 있는 것이다

 

 


 

권상진 시인

1972년 경북 경주에서 출생. 2013년 제21회 전태일문학상에 「영하의 날들」, 2015년 제10회 복숭아문학상에 「별자리」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눈물 이후』. 제7회 경주문학상. 한국작가회의 회원, 문학동인 〈Volume〉회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