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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락 시인 / 어디에 있는가
배에 오르면 소리를 지르는 악마가 붉은 화농 자국처럼 가슴에 녹아 붙었다
석유풍로 앞에 모여 신음하는 모기들 꼬리가 자란 원숭이들 까슬한 시트 위 따스한 코카인 향이 굴러간다
그는 기다린다 올이 풀린 공기를 매만지며 연애처럼 뼈가 타는 고열, 춤추는 벽, 리삐리삐 라비라비
출항의 종소리, 오오 자유에 대하여 생각한 적 없지만 자유로운 밤의 서늘한 귀 속으로
계속하자, 굶주린 짐승들이여
과즙 칠한 원주민의 시선처럼 입으로 분 불화살처럼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칼의 바다로 겨울의 하얀 이빨들은 투신하는데
살 찐 미용사와 마법의 인디오 여자와 그는 쓰리섬 언어의 무게를 견디며
제3의 언어는 어디에 있는가, 리삐리삐 라비라비 그는 항해한다 보아뱀의 검은 입 안으로 들어가는 배에서
언제나 배에서 오로지 배에서
김락 시인 / 긴 낮잠
빛나는 갈색으로 그을린 그녀의 굳은 얼굴은 화를 낼 때도 기뻐할 때도 단 한 가지 표정이었다. 웃는 입과 공허한 눈. 그것은 표정이 없는 것과 매한가지여서, 어렸을 때는 그 녀의 얼굴이 참 신기했다. 그후 내가 스무 살이 넘은 어느 여름날, 그녀가 혼자 살다가 죽은 시골의 빈집에 가서 낮잠을 청한 적이 있다. 나의 큰어머니이자 아들을 낳지 못한 맏며느리였던 그녀는 그 집에서 오랜 시간을 혼자 사셨다. 기지개를 켜면 여름 바람이 불 것 같은 고요함. 어릴 때처럼 컴컴하고 기묘한 대청마루 아래의 어둠이 뒤섞여 나는 그녀처럼 얼굴에서 표정이 점차 사라졌다. 혼자서 모든 별들의 이름을 다 부를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긴 시간을 꾸었다. 저녁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보이는 슬픈 세계와 그녀의 따뜻한 품. 그 행간에서 나는 여전히 걸어가고 있다.
김락 시인 / 복자는 십이 개월째 태동이 없었습니다
양손에서 제멋대로 자란 녹음이 우거지고 어깨가 흐려져가도록 복자는 십이 개월째 태동이 없었습니다.
배를 이해하는 대신 등으로 내려와 구겨지는 햇살 그 빛을 본 적도 없었습니다.
젖은 옷 위로 두른 아침이 무거워 복자는 주머니를 뒤져 입을 꺼내지만
세계에는 언어가 없었습니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달라지는 분위기가
없었습니다. 이불을 당겨서 만드는 감정과 웃으려고 몸을 감싸는 두 팔 그리고 불가능 주변을 서성이는 발걸음도
없었습니다. 이윽고 풍경이 얇은 밀가루 반죽처럼 머리 위를 덮고 영원처럼 늘어졌습니다. 하늘이 없었습니다.
복자가 어스름으로 엮어낸 확신에 찬 태도가 드디어 누군가를 찔렀습니다. 그 후로 내가 세상에 없었습니다.
어느덧 복자의 배가 조용한 태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김락 시인 / 꿈꾸자 몸
뚜껑이 부서진 관에서 꿈의 엉킨 긴 머리카락이 자란다
나는 해묵은 꿈이 좋아서 얼어가는 잔디 위에서 불안의 씨를 오래 까먹었다
훅훅 뱉으면 하늘에서 추락하는 흰 고무장화들 차가운 이야기들 쏟아지는
손이 골고루 시리도록 두 손을 붙여 소원을 납작하게 만들자
거미를 앓고 움직이는 감정이 되자 발을 달기 위해
김락 시인 / Just the Way I am
초록색 이불을 덮고 자다가 초록빛 연기에 둘러싸인 침대에서 재채기를 하다가 입 밖으로 혼돈이 튀어나오지 않나 나는 지식인의 표정으로 도망치다가……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부터 잘못된 것 같아 귀밑에 따분함이 잔뜩 묻은 골방, 창문을 지워 별다른 저항 없이 별명을 받아들이는 별들과 작별하고 오늘은 통증을 앓는 이빨 스물여덟 개를 만져보자 누더기 옷을 걸친 벙어리 청년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으러 진실이 담긴 술병을 건네줄게 내 천 개의 귀에 트럼펫을 울려줘 눈부신 그물그네를 만취한 이 골방에 달고 우리는 계속 흔들릴 거야 영원히 행진하는 양쪽 겨드랑이처럼
김락 시인 / 마테르 돌로로사
입속 가득한 공갈젖꼭지 헝클어진 머리털 가득한 꿀 냄새
바지 한쪽 구멍으로 나온 작은 두 발 명랑한 귀 가득한 솜사탕, 그런 아기와 여자 사이
흠집투성이 울음이 굴러가 불안하게 손잡은 들판 위로 검은 쥐들이 도망치지 컵을 두드리는 얼음들처럼
아무도 몰래 팔을 자르는 겨울나무를 지켜보기
사탕수수대로 엮은 두려움 가득 끼워진 여자의 몸
소리가 비틀거리는 라디오, 취한 비둘기, 구멍 난 두어 자루 씨앗의 행방, 바다에 흘러간 죽은 씨앗들, 나흘 후에나 강으로 빠져나가는 울음, 할 말을 찾지 못해 흐느끼는
입 가득 끼워진 공갈젖꼭지 무감한 표정으로 가는 아침 안개 가득 끼워진 두 발
김락 시인 / 옛날식 잡화점이 열린다면
어루만져주길 기다리는 소녀의 따귀 빗물을 떨어뜨리는 유령이 든 구두상자 그런 온갖 가여운 것들을 진열한 옛날식 잡화점이 있다면
유리가 흐려진 회중시계 바늘이 중심으로 사라지고 이야기하자면 이상한 잡화점이 열리고 티셔츠에 팔을 넣으며 걷다가 넘어지는 일처럼 쉽고도 어려운
책상 밖으로 굴러 떨어지는 흰 팔 그곳 바닥의 젖은 나뭇잎 더미 속에서 딸꾹질하는 어둠
빈 몸을 엽니다 이상한 잡화점이 나온다면
오래 두드린 작은북을 목 위에 달고 소녀가 마중 나와 준다면
우리는 문장의 처음 부분을 듣지 못한 친구처럼 언제까지나 귀를 기울이고
젖은 전구들 간판 아래 자욱하게 먼눈을 뜨기 시작하고
—《시인동네》 2015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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