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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춘 시인 / 라다크 가는 길
라다크 가는 길
강가에 길이 따라갑니다 그러다 뚝, 끊겼습니다 간밤에 폭우로 바위산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굴러내린 바윗돌이 떠억, 부처님처럼 좌정하였습니다 탁류는 제 본성대로 콸콸 지청구 쏟아내며 갑니다
어쩌는 수 없군요 기다릴 밖에, 옆에서 해당화들이 철없이 깔깔거리고 있어요
나병춘 시인 / 나무
나무는 제자리에서 오늘을 완성한다
내일 모레 아무 염려 없이 문자 숫자 기호들 헤아리지 않고도 관세음보살 손바닥처럼 훤히 꿴다는 듯
든든히 그림자 지키며 먼 허공 굽어보면서
나병춘 시인 / 스리나가르 호수
작은 보트가 지나가자 산이 흔들리고 집이 흔들리고 나무와 새들이 흔들린다
사람의 말이 꽃처럼 피어나자 마자 물 위에 흩어지고 구름이 흩어지고 바람이 천지사방 흩어진다
흔들리고 흩어지고 사라지는 보트 위에 사랑이 흘러가고 미움도 질투도 흘러가고 하늘은 갑자기 환해지고 호수가 반짝거린다 태양도 흔들리고 물새의 날개도 흩어지고
장사치들의 흥정이 피어나고 사라지고 삶은 저렇게 짠하고 황홀하게 가시연꽃처럼 가시를 숨기며 적막한 것인가
나병춘 시인 / 손톱
손톱은 탐욕을 상징한다 손은 사랑을 상징한다 결국 탐욕은 사랑에서 자라고 사랑은 날마다 탐욕을 길러낸다 한 두어 주일 지나면 고양이 발톱처럼 자란 손톱 절제의 손톱깎이로 과감히 잘라낸다 잘 가거라, 나의 분신이여 DNA여 손톱은 허나 손가락을 보호하고 손의 기능을 강화한다 탐욕을 이쁘게 다듬어주는 네일 아티스트도 있지 않던가 손톱이 없으면 사랑이 삭아버리고 사랑이 식어버리면 온몸은 삭고만다 사랑과 탐욕의 양 날개 아래 하루치 노동을 접고 귀가하면 손톱 달 하나 어둑한 골목을 밝히고 저녁 밥상 가에 둘러앉은 새끼들의 손가락 장단 숟가락 소리 오붓한 밥상 가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눈물겨운 손톱들이여 탐욕도 때로는 아름답구나
나병춘 시인 / 데칼코마니호수
산은 때로 엎어질 줄도 알아야 산이다
맑은 호숫물에 바짝 엎드려 목 축이는 산을 본 적이 있다
목마르면 목마르다 바보처럼 칭얼댈 줄 알아야 산이다
치장하던 허울 껍데기, 가차없이 버리고 겨울 벌판에 서서 먼 지평선 무심히 바라볼 줄 알아야 산다운 산이다
나병춘 시인 / 칼의 변증법
버리는 것은 벼리는 것이다 무딘 칼이 숫돌에 몸을 던져 제 몸을 헐어내야 비로소 날빛으로 빛나는 칼다운 칼이 된다
별들도 어둠 속에 버림받아야 비로소 빛을 발하며 제 할 일 다한다 눈부시도록 푸르른 낫에 싹둑싹둑 베이는 저 여린 풀잎들 그 처절한 살비린내 맡아 본 적이 있느냐
하동지동 떨던 풀꽃들도 염소의 되새김질에 잘 버물리어 한 잔의 우유가 되는 것이리
아득한 은하의 별자리 스스로의 날카로운 절망 속에서 비로소 깨어나는 차가운 이성의 눈동자들 천길 벼랑에 몰래 버려져 마침내 벼리고야 마는 칼의 변증법
나도 그대의 풀꽃이 되고 빛나는 이슬방울 되고 싶다 어둠 속 황금 날빛을 벼리는 초승달 하나
―웹진《공정한시인의사회》2023년 7월호
나병춘 시인 / 화살나무와 달 화살로 겨눌 과녁이 무엇이냐 뻥 뚫린 질문이 들어앉은 벽 그 완강한 벽을 찾아 발걸음을 옮긴다 이슬을 차며 적막을 털며 터덕터덕 걷는데 발걸음 딱, 멈추게 하는 그렁그렁 붉디붉은 눈동자 길고 지루한 밤 건너온 아무런 절망도 공포도 모르는 해말간 새벽 어스름 싣고서 어디로 날아가는 게냐 어둠 다 살라버리고 느긋하게 타오르는 저 과녁은 또 어디서 온 게냐 둥근 달 너에게 묻는다 발칙한 화살 입술 찡그린 듯 환한 눈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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