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민숙 시인 / 겨울숲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5.
이민숙 시인 / 겨울숲

이민숙 시인 / 겨울숲

 

 

겨울숲에는 숨을 곳이 없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맨몸의 성자들이 침묵으로

바람을 일으킨다

 

수백 영혼의 몸 너머로 고독이 달아난다

 

먼 별의 숲도 그러하리라

 

단한 눈물도 남기지 않고 벗어버린 맨사랑

 

허위허위 노래하던 가짜들이 고요히 허무를 내려놓는다

없다. 더 이상 숨을 곳이, 겨울숲에는,

 

-시집 <지금 이 순간>에서

 

 


 

 

이민숙 시인 / 날개

 

 

 땅이 녹아 흐른다

 그 땅을 갈아엎는 소, 쟁기질이 한창이다

 무논에 쭈뼛쭈뼛 연초록 잡초도 갈아든다

 

 소의 거친 숨결로 녹여낸 시간만큼 질컥거리며 부드러워지는 논흙 사이로 왜가리 떼 날아든다 논바닥에 수많은 날갯짓, 제 몸 다 갈아엎어진 붉은 흙 속 왜가리들의 양식 버글거린다 지렁이 살 쪼아먹던 왜가리 떼, 날개에 땅 수(繡) 놓여졌다 땅 박차고 일제히 날아오른다

 

 나, 저렇듯 몸 갈아엎어

 얼어붙은 목숨 녹여 한 끼 먹이 될 때

 흰 날개 세상 초입에 들 수 있을까

 

 양어깨가 싸하다

 

 


 

 

이민숙 시인 / 참을 수 없는 황홀의 가벼움2

 

 

천만 개의 황홀 조각이죠

쪼개지다 못한 윤슬, 소라 껍질로 부서지는 피아노 소리

 

피아노 건반 위로 달리는 바퀴는 누구의 영혼?

결코 잊을 수 없는 천만 송이의 바퀴 자국이 피워 올랐죠

 

바퀴인 황홀을 바턴 터치하는 허벅지 위엔 천만 마이크로 빛으로 춤추틑 바다

그땐 미쳐 알 수 없었던 나를 그대를

 

봄의 바다, 파도 깊은 가슴께에서 터치하는 황홀의 씨앗 하나가

똥그란 꽃망울처럼 등대를 밝히고 있었죠

 

매화, 참을 수 없는 꽃망울의 거친 단말마 쏟고 난 후 황홀이란

마침내 잃어버리는 것, 저 형체 없는 시간이라는 껍데기!

 

-<시화문화> 2019. 봄

 

 


 

 

이민숙 시인 / 생의 비의秘儀

─생의 비의秘儀는 시에게 필연이었다

 

 

 

산에 오르락내리락 할 때

가까이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

 

전혀 알 수 없는

내 걸어왔고 너 날아갔으나

 

우리 서로 까마득히 모르는

그늘 깊은 곳 들락날락 다람쥐꼬리 같은

기미 사랑

 

연록의 가슴팍을 쫙 펼치는 쪽동백 가지 사이로 든

물안개 봄 물바람의 빛

 

가을, 겨울아침 살얼음 피리 꼬리짓거리

동그란 주먹 안에 쥘 수 없는

언뜻 저녁노을 한 새의 깃털만도 못 한

기미, 기억,

 

내 온전히 모르는 동안에도

골똘히 흐르는 조약돌 아래로 설핏

숨어들어버리는 흠뻑 젖은 바위의 몸

 

속, 그 벗길 수 없는 꽃씨

 

 


 

 

이민숙 시인 / 눈 위의 눈

 

 

왜 우리는 발자국이 없는 그 눈길을 찾아가려 했을까

걸어가면 순하게 생기는 것, 그 발자국,

걸어가면 질퍽하게 이어지는 것,

걸어가면 옹통지게 헝클어지는 것,

 

발자국 위에 눈이 쌓인다

바람으로 눈이 흩날리고 발자국이 지워진다

금방 사라지는 것들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발자국을 찍는다

사라짐과 부딪힘은 하나다

헛됨과 그리움도 하나다

발자국 위에 눈이 쌓여도 발자국은 지워지지 않는다

발자국을 끌어안고 몸을 눕혀버린 눈의 심장 가까이엔

우리가 모르는 무수히 많은 발자국들이 숨어살아 있으리라

 

산골짜기 바람 따라 눈이 흩날린다

흩날리는 눈을 따라간다 나도 흩날린다

허공의 심장이 흩날린다

세상에서 아프게 헤어졌던 입술들이 뾰족하게 댓이파리에 맺힌다

눈꽃으로 피어나는 이별들

 

이별과 만남이 하나다

눈 위에 눈이 있고 눈 깊은 곳에 또, 눈이 있다

 

 


 

 

이민숙 시인 / 춘향에게

-김치아리랑 8

 

 

춘향아 너 김치 담가 보았니?

춘향이는 김치 담그듯 사랑을 했을까?

엄마 월매는 김치를 잘 담갔을까?

엄마는 왜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엉터리인 내게?

월매도 춘향에게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김치 담그는 법을?

춘향이는 이도령에게 깍두기에 막걸리 한 잔 하자고 했을까?

춘향이는 쑥대머리만 불렀을까?

춘향이에게서 익은 김치 냄새가 났다면 변사또는 뭐라고 했을까?

춘향이는 언제쯤 사.랑.사.랑.내.사.랑을 위해서 김치를 담갔을까?

춘향이가 생生처음 담근 김치로 첫 상床을 차렸을 때 이도령은 뭐라고 했을까?

오늘 밤 나 홀로 담근 김치처럼 얼큰 달콤 씁쓸했을까?

두리뭉실 허둥지둥 맛은 고사하고 맘도 형편없이 담갔을까?

춘향이는 몇 번이나 김치 때문에 한숨을 쉬었을까?

구름에서나 내려다보고 있는 저 ( ) 때문에 때죽꽃 눈물방울 떨치고 있는 나처럼?

춘향이는 옥獄에서도 김치 생각을 했을까?

비단실 뽑으며 시나 쓰고 있었을까?

김치 하나 함께 먹을 ( ) 없이

붉은 수숫대 바람 부는 아침처럼?

 

-시집 『지금 이 순간』 고요아침

 

 


 

 

이민숙 시인 /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그대로 있어주세요

내 다가가리다

오시는 길이 너무 멀다면

그 자리에 머물러 주세요

 

발이 짓물러 닳아 없어진다 해도

그대 안에 평화롭게 쉴 안식처가 있기에

무슨 일이 닥쳐오면 어떠하리

 

그대가 있는데

날개 한쪽을 잃으면

살아있는 한쪽 날개가 있지 않소

한쪽 눈을 잃으면 한쪽 눈이 있지 않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온전히 당신에게 가 닿지 못한들 어떠하리요

그대 품에 안기기만 하면 되는 것을

초라한 모습이라도

꾸미려 하지마세요

꾸며진 그대 모습을 보고

그대를 선택하지 않았어요

 

단 하나 마음만은 변하지마세요

그 마음 안에서 시를 짓고

노래를 하고 꽃을 피웠어요

이 세상 아무리 아름다운 것들도

그대 마음만큼 나를 움직이지 못했어요

가진 것 없는 가난한 마음이라도

나에게는 빛이고 생명이며

또 내 전부랍니다

 

 


 

이민숙 시인

전남 순천 출생. 1998년 《사람의 깊이》 창간호에 〈가족〉외 5편의 시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나비 그리는 여자』 『동그라미, 기어이 동그랗다』 『지금 이 순간』 등. 여수 샘뿔인문학연구소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