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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백 시인 / 지하멘터리
절대반지도 아닌 절대강자도 아닌 절대반지하의 열등감자입니다 조용히 눈을 감자 미소는 맥락을 잃어버리고
감자의 눈물에 눈감아온 밀정의 메아리 감자 봤어? 또 시작이네 방안엔 없나 봐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요
가난이 AIDS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숨을 작게 쉬었다 공기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각난 샤프심 갈아 끼우는 어조로 감자야 감자야 방에 있지 문 좀 열어봐 나가란 소리 안 할게
감자는 뒤틀린 쪽창을 올려다보았다 이때 태양이 촛불처럼 훅 하고 꺼지더니 비린 아스콘이 시야를 멱살 쥐듯 덮쳐왔다 반쯤 숨 쉬며 반쯤 살아가던 잉여감자에게 썩은 내장처럼 비명 지르는 숯 빛 모르타르가 쇠창살 틈으로 쏟아져 목구멍을 가득 채웠다
감자는 엉덩이가 가려웠다 싹이 나오려는 것 같았다 큐레이터는 보이지 않고 불리한 저울의 심정으로 삼엽충 화석처럼 안데르센 동화처럼
꺾이는 쪽으로 완성되는 것인가.
-2018년 계간 <시현실> 하반기 신인상 당선작 중에서
김성백 시인 / 그늘흔
소포를 열자 여름이 들어있었다
그림자는 먼저 움직이지 않는 자 어떤 그림자는 생각해선 안 될 것을 생각하다가 다치곤 한다 노랑에 맞서는 여우팥처럼
털을 생각하다니 여름은 계절이 아니라 짐승이 아닐까
여름을 꺼내자 그림자만 남았다
그림자가 생각을 갖게 되거든 그림자에 못을 박아두어야지 팔월의 그늘에 들어선 그림자는 더 두꺼워졌을까 녹아버렸을까
그림자 없는 소년과 그림자뿐인 소녀가 서로를 발굴했다 한 겹씩 벗겨낼 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유물처럼 과거에 대해서만 말했다 그해,
두 입술은 아주 더디게 지워졌고 쌍니은처럼 닮아갔다
똑같은 꼬리를 나누어 가진 우리는 바닥에 너무 오래 있어서 나는 법을 잊어버린 펭귄처럼 뒤뚱거렸다 서로에게 앞자리를 양보하듯 무릎을 꿇고서
상처는 아무는 게 아니라 노을처럼 저무는 거라고 바람이 말했던가 전생의 깊이를 재던 유목의 수호신이 말했던가 얘들아, 더 가난해져야지 경계마저 버리고 자유로워져야지 지층 깊숙이 울음을 파묻던 쌍니은은 그제야 그림자에서 그늘로 넘어갔다
꼬리에게 물려본 사람은 안다 여름에서 하나씩 버리면 어른이 되지
그늘은 빛을 죽이는 꿈을 꾸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제 창조주를 기다림이 어두울수록 끄트머리가 헐거워지는 그늘의 실패
그날, 절반의 피조물 더 진해진 여름이 멸망하고 있었다
웹진 『문장』 2022년 10월호 발표
김성백 시인 / 늙숨
단추라는 놀라운생각 뒤에는 구멍이라는 숨은생각이 있었네
구멍은 그냥 이름일 뿐이지만 저를 둘러싼 살붙이들 덕분에 제 얼굴이 응혈처럼 값으로 드러나는 것 쓸모가 드나들도록 몸을 줄였다 늘였다 밥상의 배꼽선을 잡아주는 일
지나고 보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구멍임을 알았네 이제는 내가 두 아이의 허물임을 알았네 있음에서 없음으로 맺어지는 황홀한 중첩 늙은 구멍에 차오르는 상실의 질량을 알았네
은하를 키우는 검은 구멍의 거대한 無心을 알았네
0을 알았네
-<시인동네> 2020년 5월호
김성백 시인 / 소크라테스 정리
설거지는 체념의 자세로부터 나온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해우소의 염주처럼
오병이어로 5천 명이 먹고 남았을 때 갈릴리의 누군가는 찌꺼기를 모아 치웠고 3만 왜군에 맞선 진주성의 열혈백성 누군가는 죽을 쑤고 그릇을 닦았고 1만 4천 명을 태우고 흥남부두를 떠나온 배 안에서도 누군가는 냄비를 닦았으리니 역사는 부엌의 행간을 기록하지 않을 뿐, 먹고 떠난 자리는 누구로 인하여 아름다운가
수세미는 거두절미가 되고 개수통은 철두철미가 되는 원래대로의 정석 혼돈과 질서를 버무려 새로운 감칠맛을 낳는 카오스모제 열매만 보지 말고 흙을 보라고 했다 잔반 처리를 넘어 생명 순환의 맥락을 이해하는 일 레몬 향 가득한 식도락을 배후에서 조율하는 일 물기가 마르는 곳에서 잡도리는 시작된다
직진 반사 굴절로 어둠을 몰아붙였던 야전의 시대는 가고 우뭇가사리보다 느리게 한 발 한 발 젖은 공백을 내딛는 내수용 근육들아 해전치기의 달인들아 쪽창 밖 구름 너머 덜 닦인 접시 하나 응응 뜨고 거리엔 뿔난 입들과 반성 없이 허허로운 목들, 끊어진 섬들 은하철도를 타고 오는 여인의 손끝엔 마미손 할인패키지 묶음뿐이라니 깨져버린 자기 조각들이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밤 공양간 지박령은 얼마나 아픈 체위이던가
나는 집안에서 풀어야 할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나는 말할 수 있나니 부활하는 하루살이들아, 너희는 나와 함께 극락정토로 가자
서풍이 붐비어 팔뚝의 김칫물을 지우고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설거지는 반야정관이다
살림대학 기초생활학부 설거지학과 삼 년 차에 이르러 조리학 빨래학 청소학까지 멀티전공을 이수한 나는 어찌하여 철학자가 아닌가 레인지 후드의 찌든 기름때로 탱화를 그릴 참이면 바라밀이 지천이다 안거낙업을 실천하는 익명의 비구, 리필 용기에 퐁퐁을 웊웊 채운다
안산자락 대웅전이 웃고 있다
김성백 시인 / 사량(思量)
너는 가고
글자가 글자를 물고 입술과 입술 사이를 지나는데
다친 글자들이 서로의 허리와 팔다리를 그러쥐고 안간힘으로 폐허를 전하려 할 때
허공의 끝에서 차츰 어두워진 자음 두엇과 긴 행군에 지친 늙은 모음 서넛이 뒹굴고 엉기다가 약속에서 이탈하는 불상자들, 이윽고 우수수수
볼그족족 쐐기만 수메르의 우표처럼 남아 배달부의 수고를 기억할지도 모를 타국의 봄처녀가 입양한 오월의 작약만큼만 남아 예쁜 것도 슬픈 것도 딱 그만큼만 남아
서풍이 대신 써준 손 편지에는 온통 울긋불긋 기척만 그윽하여 미라처럼 꽃그늘처럼 허깨비처럼
나는 뒷모습이 없는 채로 너에게 가고 -웹진 『시인광장』 2024년 8월호 발표
김성백 시인 / 석태아 외로움과 그리움이 마주 보았다 단 한 줄의 숨통이 끊기는 순간 나는 둘 중 하나의 적이 된다 외롭다는 것은 사랑받을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 머리를 토해 내듯 이름을 꺼내야지 바깥을 조롱하며 빨간 체리 향에 취해 조금씩 나를 보여 줄게 엉덩이 살 15g 늑골 한 개 심장 1/4 쪽 척수 세 토막 적혈구 1/2 큰술 양수 조금 탯줄 약간 모든 외로움은 요리가 될 수 있어 상처를 궁굴려 덧남을 즐기는 시인처럼 말이야 울음뿐인 세상에 몰래 피어나 눈물 한 방울 보태지 못하고 돌이 된 빨간 꽃 우주는 거대한 생각이라는데 생각을 미처 갖지 못했으니 우주의 일부도 아닌 어쩌면 꿈이었을 미확인 물체인지도 모르지 해마다 봄이면 지구에는 천공의 별만큼 꽃이 피고 동물로 태어났지만 식물처럼 꽃을 피운 나는 어릿광대의 나팔 소리가 들려 잊혀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야 몸을 버리면 돼, 마음 하나면 충분하니까 돌이 썩지 않는 건 생각이 없기 때문이지 하지만 내가 아는 유일한 우주는 벙어리라서 생각 대신 자세를 연구하는 아이가 있어 그립다는 것은 사랑할 기회마저 빼앗겨 버린 것 꽃씨를 토해 내듯 촛불을 꺼내야지 엄마를 조롱하며 하얀 발자국에 취해 조금씩 나를 보여 줄게 나도 모르게 모든 그리움은 종교가 될 수 있어 죄와 벌을 만들어 믿음을 강요하는 신처럼 말이야 -아르코문학창작기금
김성백 시인 / 빵 나오는 시간
여인이 방을 나오는 시간은 빵들의 장례식 너는 두 개의 창문 너머로 방을 본다 부풀어 오를 대로 올라야 숨이 멎는 곡물의 뼛가루
여인은 반죽이 모양을 배신할 때면 손바닥 우려낸 물에 방을 헹구곤 했다 오븐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던 많은 밤들 달에 간 엄마의 뒷면을 열어보듯 여인은 구경꾼의 공복을 팔아치울 것이다
너는 포르투갈에서 살다 온 사람처럼 여인에게 말한다 저 두드러기들을 모두 살 테니 당신의 세 번째 얼굴을 주시오
흙의 진절머리며 바람의 설왕설래며 물의 동안거며 불의 우격다짐 같은
빵이 있던 자리에 이름만 남았다 빵이라 불리기 이전의 빵처럼 다소곳이
여인의 세계는 팥도 계란도 이스트도 없다 여인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나중엔 우유도 설탕도 밀가루도 없다 맛을 버리고 북쪽으로 날아오르는 기러기 떼에 편승해 여인은 방을 떠날 것이다 재귀함수의 탈출 조건인 양, 마지막 얼굴은 계산대 옆에 남겨두고서
무에서 유가 태어나는 우연과 빈 고택에 누룩이 움틀 확률에 기대어
텅이 가득 찬 빔에서 멍이 분주한 함까지
여인이 없어도 빵은 나오고 방이 없어도 몰려드는 아랫목들은 일찌감치 누울 자리를 폈다
너는 가라앉은 심장의 꼭지를 살짝 비틀어 미뢰를 창밖으로 흘려보낸다 젖은 말들을 한 계절 부스러기도 아니면서 너는 눈먼 종소리에 나부껴 시식을 외칠 때
여인의 첫 번째 얼굴이, 지워진 얼굴이 객석에 흥건하고 여인 뒤로 소보로만 한 구멍들이 덩달아 따라 나온다
커튼콜이 밀려 나오는 무렵에 식욕들이 줄을 서는 벌건 대낮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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