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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귀영 시인 / 알제의 여인들
열여섯 번째 변신 중인 우리는 열여섯 번째 패러디다 누구의 그림자인가 무분별한 발들이 자란다
문에 서 있는 여인 거울 속의 여인 돌아보는 여인 푸른 옷 시선 아래 검은 여인이 자란다
흰 발을 피하는 검은 여인 검은 가슴을 열고 여인2 엎드려 둥근 배를 가둔다 식탁 부스러기 빛을 움킨다 젖을 물린 눈빛, 우리는 변신 중이다
여인3 여인4 새벽까지 부수어졌다가 허물어졌다가,
상상하다 무한하다 친근하다 적대시하다
넷이 하나 넷이 열이다 넷이 백, 천, 만.......변신 중이다
만인에 대하여 미분과 적분 공존에 대하여 서둘러 오는 아침은 서둘러 사라지고 무섭게 저미고무성하게 쌓이고, 변신 중인 것이다 우리는 여인에게 눈길이 따라올 것이다
조금씩 일치하는 조금씩 희박해 가는
단단한 파편들, 우리는 붉고 높은 의자에 앉는다
이귀영 시인 / 애도
무슨 가면을 쓸까, 입술이 비치는-비늘이 비치는 옷깃 날리며 강남엘 갈까 강북엘 갈까 뒤를 돌아 볼 수가 아래를 볼 수가 없는 철가면 밤과 낮을 돌아 온 걸음으로, 종말을 살지 않았다는 증거의-무표정으로, 왼쪽으로 기우뚱 고즈넉한 가면을 쓰고 말하지 않는다 오늘을 쓰지 않는다 미래가 이미 과거, 미래의 사랑을 쓰고 그― 수없이 겹쳐진 얼굴을 쓰고 오늘이 종말이라 예측하는 불순한 일기예보에 부르주아 유형의 표정으로, 아니면 근엄한, 아니면 바우타, 아, 오늘이 아니니까
지고이네르바이젠이 비수처럼 찌르는, 왜 더블베이스는 안 되나, 피치카토는 왜 안 되는 건가
오늘은 살아야 할 텐데 무엇으로든 겨울이 쳐들어오고, 악보는 밖에서 떠돌고 다시 뜨지 않아서 좋은 태양, 울지 않아서 좋은 오늘, 비 춤추리 바람 춤추리 춤추는 밤을 기다리는 불빛에 길게 드리운 그림자 잎새 없는 나무였다가 숨은 그림이기도 한 먼-얼굴이다가 썩어가는, 타오르는, 백골로 뒹구는 상상을 하며 비굴한, 때론 비장한, 가면 헐렁헐렁 쓰고 다닌다 초침 명령대로 시간시간 대사만 외워대며 너를 위해 검은 얼굴을 쓴다 검은 구두 검은 수츠 검은 꽃 검은 모자 검은 하늘을 덮어 쓰고
돌아서서, 붉은 알몸의 자정을 기다리는 눈빛 육체 없는 가면 오늘을 외도함으로
어슬렁 또 다른 오늘, 그 동물이 오면 무슨 얼굴을 쓸까
아직, 지고이네르바이젠이 흐르고, 지고이네르바이젠을 벗어난 적이 없는
이귀영 시인 / 지하철 타고 집으로 가는 하루살이 날개
오늘 하늘을 처음 본 느낌인데 첫 키스의 영원한 순간 오늘이 지나면 다시 오지 않을 낮 다시 오지 않을 밤 사랑도 오늘 하루 폭우도 오늘 하루 질투도 오늘의 것 영원하지 못한 것들이 찬란하다 동토凍土를 지나온 우리의 만남이 영원하지 못하다 승부를 건너던 발자취도 공룡을 잃어버린 기억도 언제 배 불렀던가 굶주린 하루는 영원의 한 점 지상의 역사가 영원하지 못해 지구는 늘 찬란하다 한 줌 모래도 남기지 않고 오늘은 끝나는 것 그대 떠나고 낡은 옷만 남아있는 벽 구르다가 그대의 지문이 지워지는 날 내일이 있다면, 어느 허공에서 어느 심장으로 부유할지? 살아있는 오늘은 몸으로 듣고 몸으로 취하는 하루 당신을 향한 아픔도 나의 사역事役이니 날개를 접을 수 없습니다 두려워요; 녹슨 방충망에 끼어있는 힘으로 내 안의 허공을 종일 퍼내고 모독의 시간을 퍼내면 그날은 오고 있는가
타르 같은 삶과 죽음이 사라지는 그날은 오고 있는가 창밖이 깜깜하다 영원이 보이지 않는다
- 계간 『시인시각』 2010년 가을호
이귀영 시인 / 좌파·우파
내가 있는 곳에 좌가/우가 있다 오른쪽 사람/왼쪽 사람 오른쪽 집/왼쪽 집 오른쪽 하늘과 땅/왼쪽 하늘과 땅 오른쪽 이유/왼쪽 변명 오른손 흰 걸레가 오른쪽 바다를 왼손 흰 걸레가 왼쪽 흰 바다를, 좌우가 같지 않은 세상몸에 중심을 세운다 두 귀에 이는 바람 무게가 다른 경계를 안고, 대칭을 안는, 좌/우 좌/우의 아우성, 절벽이 내지른, 밤이 내지른 이슬, 풀잎 중심에 구르니 단단한 새벽빛이 되는군 세상을 압축하는 뇌. 우글우글 고뇌 이야기가 되는군 오른쪽 왼쪽 명령에, 두 발 어디로 가야할지 두 손 어디로 펼쳐야할지 좌가/우가 포진하고 있다 내가 보는 tv에 여자/남자 박근혜/안철수 안/팎이 있다 내가 마시는 커피에 크레알토/카프리치오 캡슐이 있다
점심엔 무엇을 먹을까? 어떻게 끝나는 건가?
이귀영 시인 / 한 손에 안기는 이상 이상 이상
’98년 등단초기 월간지 말미에 시 두어 편 발표하고 몇 달 황홀하더니 해가 지나 한 해에 스무 네 편을 발표하더니 어느 잡지에 신작 차례 절반 위로 훌쩍 오르더니 어? 이번 책엔 끝부분에 게재 되었네
가나다 순 인가? 아니다 등단 순인가? 아니다 앞뒤 페이지 몇 번 뒤적이다 유명 순인가? 등단지면? 나이순? 아니다.
그거 모던하네 아니다 거 포스트모던하네
시를 앞에서 읽어가다가 절반 못가서 덮는다 시를 뒤편에서 읽어가다가 절반 못가서 덮는다 엊저녁 tv뉴스를 조간신문에서 읽는 듯, 하였는데
고품도 신품도 다 볼 수 있는 無順 등단무순-나이무순-시집유무순-유명무명무순
―좋은 느낌 이다
어디서 시작해도 좋은, 얇아서 좋은, 휘감아서 좋은, 내 이상과 얼추 맞는 모더니즘의 『이상』 모더니스트 이 선생, 한 손에 안기게 더 날씬했으면-좋은,
이귀영 시인 / 짓다만 건물
아직 그러하지 아니하여 다시 금빛 석양을 대한다. 색채를 덧입어 발견되어지기를
당신과 나 그와 나 편편이 기대어 애무하며 두 편대 사이 영원한 질서 당신과의 햇살 그와의 달무리를 입어
짓다만 과거 짓다만 미래 검은 창 수두룩 열어 놓고 구르는 나무도막과 조각타일들 한줄기 햇살 生의 이야기들 열린 뇌관에서 녹슬어 나오는 꽃술 잔 밖으로 풀이 눕는 그곳에서
두 팔 벌린 몸에 쏟아 내리는 낮과 밤 게으름으로부터 미완의 音樂을 듣는다.
시간이 살지 않는 공간 어둠이 어둠으로 슬며 흐르며 짓다만 건물 언젠가 금빛으로 떠오르기를 지붕없는 칸막이 없는 속삭임은
내 모든 정지선이 걸작인데 내 모든 빛이 오름인데
나의 직선이 그의 곡선으로 갈 수 없는 영원한 미완이다. “직선은 人間의 線이고 곡선은 神의 線이다"*.
*안토니 가우디
-월간 <현대시> 2020년 6월호, 신작특집 -
이귀영 시인 / 공경도하가公竟渡河歌
사람들이 가고 있다.
인생에 대한 분노는 떨어뜨린 동전 한 잎 굴러가는 곡선을 따라가다 놓친 걸음
열매를 바라는 눈에 하늘을 담으며
황금은 있는 거요? 고통은 사라지는거요?
집, 아늑한 집 말이오? 도달하기 어려운 곳이오? 아무도 다녀온 이가 없는 거요? 이렇게 달리면 되겠소?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는 시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거기까지 구르는건 문제가 아닙니다
동박삭이오? 3년 6년 9년을 계속 구르며 가려 하오?
몸을 구르며 꿈이 부푼다 구름을 밟고 두 팔을 휘두르며 마구마구 -아득한 꿈을 꿔야 합니다
생각이 안 되오? 얼마만한 거리요?
보일 듯 보이지 않는다. 긴목으로 그쪽을 향해 헤매는 눈길 언제까지 가야하오
사람들에 끼여
나는 가고 있는 거요?
도착점을 모르고 남은 시간을 모르고 그대 향해- 가고 있다.
임이 결국 물을 건너가셨네 공경도하公竟渡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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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