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조성국 시인 / 너에게 갇히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6. 1. 6.
조성국 시인 / 너에게 갇히다

조성국 시인 / 너에게 갇히다

 

 

우물 팔 자리

삽 세 자루의 길이만큼

빙 둘러

금 그어 놓고

삽날 끝이 벌써 닳도록

서른 자 남짓 파 내려가면

 

허리 굽히고

흙 퍼 담은 두레박줄

수백 번씩이나 끌어당기는

깊이만큼

점점 파 들어가면

 

행동거지가 옹색해진다

파들어 가는

넓이가

거꾸로 선 원뿔마냥 좁아지고

아득히 좁아져서

빠져나가지 못한 극지가 생긴다

 

아 하고 캄캄하게 소리치면

둥글게 땅이 트이면서

아 하는 소리를

환하게 받아주는 공명 일듯

너에게 파묻히는

푸욱 파묻히고 싶은 일이

바로 그러했다

 


 

조성국 시인 / 꿀밤

 

추격해오는 형사를 따돌리려다가 그만

청과물 진열 좌판을 냅다 건드렸나봅니다

얼핏 보기에 여러 개의 사과가 떼굴떼굴 굴러가고

서너 무더기 바나나며 과일 등속이

길바닥에 쏟아졌나봅니다

미안해서 슬쩍 뒤돌아보니 글쎄

행상여자가

미끄러지듯 훌라당 뒤로 자빠져 엉덩방아를 찧는

형사 아랫도리를

대차게 붙잡고 늘어지고 있지 뭐입니까

웃음이 절로 나서

한참을 웃으면서 도망쳐보기는 난생 처음이었습니다만

웬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나는 대공 분실 조사실에서 덤터기 쓴 과일값 물어내놓으라고

닦달하는 형사의 꿀밤을 얼마나 맞았던지

지금도 그 생각하면 이마머리가 얼얼해지며

왜 그렇게 웃음은 또 뛰어나오는지

 

 


 

 

조성국 시인 / 어버이의 잠

 

쌀자루나 고구마차대가 쌓여있기 일쑤여서

발을 쭈욱 뻗을 데라곤 없는 초가 방에 열두 식구가

누우려면 서로 엇갈려 눕는 게 상수다

몸에 둘러붙은 살갗인 듯

퍽이나 금실 좋은 어버이도

반대편으로 누워 잠드셨다 막둥이까지 다 커 솔가한 지금도

아버지가 머리를 남향에 내려놓으시면

어머니는 머리를 북쪽으로 내려놓고 잠이 드신다

내 생애보다도 훨씬 오래인

이 가긍한 잠을 드셔야만 편안해 하신다

 

 


 

 

조성국 시인 / 윤슬

 

살그머니 밀려와

일렁이던 윤슬이 긋고 간

줄무늬의 금

도린곁 산기슭에서

말끄러미 지켜보면 극명하다

썰물이 지고서야

바닥 깊이를 드러내듯

손바닥 살갗도

썰물 뒤 개펄과도 같아서

한 번쯤 멀리 밀쳐두고

손금 보듯이 낱낱이 살피면

밀어냈다, 끌어당기고

끌어당겼다, 밀어내는 몸부림의

상처가 엿보이기도 했다

슬그머니 일렁이는

윤슬의 누굴

내 몸에 앉히는 일이

이렇게 물 비린 상처다

 

 


 

 

조성국 시인 / 화안한 떨림

 

성냥골 같다

망울진 매화나무가

불 켤 채비를 다 한 모양이다

대 그늘진 뒤란이라

화안히 켜지기도 하겠다

내 안에 들어와서

마냥 응달이었던 당신

살 면서, 너무 시리고 시리던

불찰만 저질러서

솔직히 다는 말하지 못하였는데

용케 몇 계절 순배 돌 듯

돌아와서는

연방 심장 크게 뛰는 아 그런

애틋한 것 며칠

성냥불 켜듯

꽃등 밝혀 오롯해 한 것이니

감사나운 꽃샘 인다 하여도

외려 후더워나겠다

 

 


 

 

조성국 시인 / 적멸

 

 

깃든 벌레를

오색딱따구리가 파먹고는

숨통 같은 구멍을 내놓자,

표고버섯이 부풀어 올랐다

흉한 고사목에 넌출지며 감아든

보랏빛 칡꽃도 얼크러지고

그 나무 밑 감춰둔 상수리 한 알을

입에 문 채 죽은 청설모의

육탈된 흰머리 틈새로

참나무 움이 여릿하였다

어떤 죽음이든 어떤 삶이든 유목의

먼 북방 대륙에서나 보이던 생몰의 조화가

예서 몇 발자국 안 떨어진,

내가 사는 집 근경의 산발치에서도

번번이 목격되었다

 

-시집  <슬그머니> (실천문학사, 2007)에서

 

 


 

 

조성국 시인 / 꽃살문 고운 내소사 대웅전에 와서

 

아내가 낀 답사단체 따라

꽃살문 고운 내소사 대웅보전에 갔더니

삼존불 모신 불단 뒷벽 가득히

백의관음좌상이 그려져 있습디다

해설사 설명대로 얼떨결에

그 좌상의 눈을 보고 걸었더니

관음좌상의 눈이 따라온 듯도 하고

또, 전설처럼 그 눈과 마주치면서 소원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길래

냉큼 급조한 소원 하나 빌며 나왔더니 글쎄,

또 다른 소원이 불쑥 생각나지 뭡니까

이미 빌었던 소원을 다시 정정해도 되나 싶어

그 좌상의 문 밖을 기웃기웃

그렇게 내가 기웃거려놓고서는 글쎄,

꽃살문 고운 내소사 대웅보전에 와서

괜히 터무니없는 욕심만 크게 키웠다고

아내 타박만 놓았지 뭡니까

 

-시집 『둥근 진동』에서

 

 


 

조성국 시인

전남 광주 염주마을에서 출생. 1990년 《창작과 비평》 봄호에 〈수배일기〉외 6편 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 『슬그머니』 『둥근 진동』 『나만 멀쩡해서 미안해』 『귀 기울여 들어 줘서 고맙다』. 동시집 『구멍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