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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영 시인 / 구름의 시간
구름을 이해하려고 구름을 모으기 시작했어
매일 바뀌는 감정에 대해 수시로 변하는 기류에 대해 흩어지는 표정에 대해 좀 더 깊어지려고
누군가는 바람 때문이라 하고 누군가는 물기 때문이라 하고
어느 날은 아침부터 피어난 먹구름을 모아 냄비가 다 타도록 끓였지
끓이면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믿고 싶어서
가끔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은 나 혼자만일까
점, 점, 마음을 떼버리다 거짓말처럼 한 번씩 하늘에 이마를 부딪치곤 해
형태를 모으다 몸을 버린 것처럼 색채를 모으다 마음을 버린 것처럼 텅 빈 하늘이라니
구름이 아주 멀리 가지는 않을 거야 구름은 내 곁에서 맴도는 걸 좋아하니까 그렇게 오늘의 구름을 오독하다가
한 번씩 거짓말처럼 텅 빈 묵음(默吟)을 만난다
구름 너머는 얼마나 먼가, 생각할 때 어디선가 목화처럼 피어나는 구름의 시간
덜컥, 묵음의 입술 열리고
목화송이 툭, 떨어지고
-시집 『귤과 달과 그토록 많은 날들 속에서』, 푸른사상, 2024
홍순영 시인 / 부추
부추를 살 때마다 신중하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하지
머리를 가지런히 맞대고 살을 부비며 누워있는 저들을 보면서 형제도 없고, 이웃도 없는 내가 거창한 연대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지 못하는 당위와 변명을 세찬 물살에 흘려보낼 때
모두가 새파란데 안쪽을 살피면 서넛은 꼭 끼어 있는 누렇게 뜬 얼굴 자신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한 자들의 낯빛은 이웃을 오염시킨다
시든 것을 물에 담그면 싱싱해진다는 건 몇 프로의 확률일까 변해버린 낯빛은 쉽게 회복되지 않고 정답을 기다리는 동안 시들어버리는 질문들 동색이지만 함께 묶일 수 없는 부추를 한 다발로 묶어버린 손은 어디에서 쉬고 있나
부추 속에는 부추였던 내가 있다 부추이길 포기한 내가 있다 부추가 되지 못하고 슬그머니 빠져나오는 내가 있다
이만큼 도망쳐 와서야 나와 무관한 것은 무관한 것, 중얼거리며 일어설 때 그건 아니잖아? 와르르 쏟아지는 부추, 부추들
홍순영 시인 / 고통이 미각에 닿기까지
칼을 쥔 자와 지켜보는 자 난폭한 백열전구 밑 긴장이 흐르는 도마 위에 이 무대를 신선하게 빛내줄 내가 있다 이곳에서 싱싱함이란, 죽음의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일 아무도 예를 갖추지 않는 죽음 앞에서 횟집 남자는 염을 하듯 두어 번 내 몸의 물기를 걷어낸다
차디찬 도마에 누워 바라보는 시선들이란 뚝, 뚝, 물기처럼 떨어지는 식욕과 조급해진 칼날의 눈빛 같은 것
끈질기게 쫓아온 여자의 시선에 불안하게 반짝거리는 비늘 바다를 떠날 때부터 나는 이미 빛을 놓친 것이지만 한줄기 위안처럼 더 선명히 떠오르는 푸른빛의 황홀함 옷자락을 끌며 아련히 사라지는 빛이여 나는 아주 천천히, 저편으로 건너가려 한다 누군가의 혀에 닿을 때까지 스스로의 죽음을 바라보도록 오랫동안 눈 뜨는 법을 배웠던 기억 나를 휘감았던 빛을 떠올리며 깊은숨을 몰아쉰다 당신의 혀가 극에 달한 마지막 숨결을 맛본다
모든 미각은 고통의 눈을 감기고서야 눈을 뜬다
홍순영 시인 / 속죄양
초록 자욱한 들에 웅덩이처럼 누워 있는 흑염소를 뛰어넘어 우리는 고모 집 마당에 도착했지 집 안에 들어서려면 말뚝에 박힌 흑염소를 한 번 더 통과해야 했는데 가로로 쭉 찢어진 염소 눈이 한 번씩 깜박일 때마다 고무줄넘기를 해야 그 윤기 나는 어둠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어
염소 뱃속에는 풀을 방목하는 고모와 그녀의 오래된 기도를 듣느라 한쪽 귀가 삭아가는 커다란 나무 십자가, 검고 추레한 성경이 누워 있었는데
말없이 풀만 잡아 뜯던 엄마는 혼자서 왔던 길을 돌아가고, 고모는 내내 흑염소 똥만 구슬 줍듯 하고, 나는 염소 눈을 쫓아 빛과 어둠 사이를 폴짝폴짝 넘어 다녔는데
그날따라 사탄의 색인 505 털실로 짠 빨간 원피스와 빨간 구두를 신은 나는 고모의 기도 속에서 활활 불타오를 것만 같아 오금이 저렸었지 염소 뱃속에서 하루나 이틀 뒹굴면 다시 찾아오는 엄마, 내 손을 잡아끌며
뒤돌아보지 마, 염소가 자기 가죽을 훌러덩 뒤집어씌워서 널 데려갈지도 몰라
종종걸음 치다 보면 어느새 엄마 손에 들려 있는 염소젖과 달걀 몇 개
엄마는 집에 오자마자 의식을 치르듯 양은냄비에 데운 염소젖을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 날계란 하나와 함께 내게 먹이곤 했어 그 비릿한 맛에 손을 내저으면서도 나는 왠지 도망갈 생각을 하지 못했지 다만 네 발 묶인 짐승처럼 타다만 불 냄새와 미지근한 젖 냄새 속에서 눈물을 찔끔거렸어 방바닥에 모로 누워있다 보면 어느새 나는 누군가의 주문 같은 기도 속으로 혼곤히 빠져들곤 했는데 흑염소가 눈을 깜박거릴 때마다 나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 세상에 떨어지고, 또 떨어지곤 하는 것이었어
홍순영 시인 / 저녁을 먹는다는 말
저녁은 대체 무슨 맛인가 붉은 구름의 맛인가, 오렌지 잼의 맛인가 저녁을 생각하면 늘 속이 아리고, 느린 걸음으로 오는 이내* 는 조금씩 서러워 난 한 번도 떠먹을 생각 하지 못했네 살찐 저녁은 떠오르는 달의 맛이었을까 난 한 번도 수저를 못 들었는데 저녁은 대체 무슨 맛인가
어둠이 발등에 내려 앉을 때까지 달고나를 먹을 때처럼 조금씩 빛을 떼어먹던 기억 부스러지지 않게, 금 가지 않게 엄마가 올 때까지 아주 천천히
엄마의 저녁은 아스라이 멀기만 해 나는 눈과 귀가 고프고 내가 맛보지 못한 저녁은 모두 어디에 모여 있나 엄마가 불러내지 못한 저녁은 모두 어디에 졸고 있나
설움과 기다림 조물조물 무쳐진 저녁을 먹는다는 말
오늘 난 오래된 엄마와 저녁을 먹는다
*해 질 무렵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
ㅡ시집 <오늘까지만 함께 걸어갈> 에서
홍순영 시인 / 카오스 옆집에는 코스모스가 산다
경사진 밭 가득, 잡초 이름이 피어있었다 개망초와 바랭이, 방동사니 곁으로 박주가리가, 환삼덩굴과 칡넝쿨이 친애하지 않는 것들의 목록이 길고 또 길었다
사람들이 길을 찾아 거리를 헤맬 때마다 잡초들은 몰래 그 길들을 훔쳐왔을까 일주일 새 너무 많은 길들이 우르르 피었고 사람의 길은 다 지워졌다
내 길은 어디 가서 찾아야 하지
나도 그들 이름을 지워버렸다 때로 지워야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까 이름표를 잃어버리자 알 수 없는 물고기가 된 것처럼* 그곳엔 이름 없는 풀로 태어난 풀만 남았다
길이 지워져도 아주 사라진 건 아니라는 듯 바람 불 때마다 풀은 길을 꺼내놨다 얼른 뒤로 감추곤 했다
길을 잘못 든 섬서구메뚜기 방향을 가늠하고 하늘이 지워버린 구름 찾느라 사마귀는 허리를 꺾는데
풀의 이름도, 길도 사라진 곳에 피어난 한 무더기 붉고 흰 우주 정수리를 건드리는 잠자리 날개
내 발은 어느새 코스모스 쪽으로 방향을 틀고 * 룰루 밀러 작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차용 -계간 『백조』 2023년 겨울호 (15호) 발표
홍순영 시인 / 히비스커스
모든 피는 흙으로부터 만들어진다는 거
내 피도 태초의 인간과 다를 바 없어서
흙을 밟을 때마다 나는 수혈받는 중이라 생각한다
이국의 태양과 바람과 비를 묻혀 온 꽃잎 따뜻한 물에 노독을 풀어낼 때 우리는 서로의 슬픔을 휘저으며 수혈이 끝나길 기다린다
먼 곳으로부터 당도하는 낡고 빛바랜 이야기
꽃잎도 지친 눈꺼풀도 눕는다
오늘 나의 혈액형은 히비스커스 둥글고, 시큼하고, 뜨거운 목소리로 뭉쳐진
홍순영 시인 / 귤과 달과 그토록 많은 날들 속에서
달을 만질 수 없어서 귤을 만진다
너는 노랗고 둥글다는 이유만으로 내게 와 달이 되고, 나의 손바닥에 붙들린 우주가 되고
이곳에서 차디찬 귤 하나를 들고 너의 이름을 부른다는 상상만으로 나는 둥근 목소리가 되지 허공에 뜬 비상구를 두고 너와 나는 가쁜 숨을 공유하지
달은 나날이 커지고
우리는 분명 저곳으로 사라질 수 있을 거야
분명하고 유쾌한 예언을 품고 하루를 굴리지 애써 말하지 못하는 눈사람이 되지
데구루루 굴러온 귤이 눈앞에 수북이 쌓이고 달은 하나, 둘, 셋...... 아아, 이토록 많은 너와 나의 날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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