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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시인 / 안쪽을 위하여
소싯적엔 신발 바깥쪽에 신경을 쓰곤 했던 것인데 요즘 들어서, 발가락에 자주 땀이 차는 걸 느끼면서 어쩌다 그렇게 신발의 안쪽을 들여다보게도 되었다 큽큽한 발 냄새가 먼저 와서 들키는가 싶더니 끌고 온 길들의 요철, 지난 시간의 버짐 같은 기억들이 껌처럼 들러붙어 있는 것을 마주치기도 한다 . 말하자면, 신발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일 한때는 그렇게 바깥쪽을 향하여 온전히 빛이 나기를 바랐던 열망의 반대쪽에 자리한 순식간에 코를 싸쥐게도 하는 그것이 신발을 더더욱 신발답게 하는 안쪽의 일이었음을 유심한 마음으로 느껴보기도 한다.
정윤천 시인 / 구석
시로 삼아 시집에 넣기에 만만한 것이 하나 있다. 외진 상가 부근(삼천리표 자전거 대리점 옆)이거나, 물 간 고등어 한 손 같은 것들로, 해찰 많은 걸음에 기대어 남부여대하던 허름한 장바구니의 동구 끝에 퍼질고 앉아 있기도 한다. 대량생산을 위해 벨트를 걸거나 자동 라인을 가동하지 않아도 되는 마지막 수공업과도 같은 이발소여, 그렇게 시집과 이발소는 여겨볼수록 닮아 있다. 하나는 4천원 하던 제 몸값이 6천원이 되기까지 꼬박 십 년 넘게 걸린 영구(앞니 두 개 빠지고 칠부바지 걸친) 닮은 것의 이름이며, 다른 하나는 더 말하여 무엇 하리. 찜통에 데운 온수 한 바가지를 물뿌리개에 담아 흘러내리는 비누거품을 잰 손길로 씻겨주고 나면, 그새, 물려놓고 온 장기판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던, 변함없는 버르장머리는 누구도 어쩔 수 없다. 애초부터 그들에겐 社訓이라곤 없다. 강령도 따로 없어서 꼴리는 대로 행간을 내거나 가르마를 타기도 한다. 삐걱임 많은 의자에 걸터앉아 녹슨 바리캉에 들기름을 치기라도 하듯이,그래도 어디 쓸 만한 낱말 하나 찾아 나서다 보면, 저저로 쓸쓸해지기도 하던 시의 저녁 무렵이여, 두 구석이 닮았다.
정윤천 시인 /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눈앞에 당장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다. 어느 길 내내, 혼자서 부르며 왔던 어떤 노래가 온전히 한 사람의 귓전에 가 닿기만을 바랐다면, 무척은 쓸쓸했을지도 모를 서늘한 열망의 가슴이 바로 사랑이다.
고개를 돌려 눈길이 머물렀던 그 지점이 사랑이다. 빈 바닷가 곁을 지나치다가 난데없이 파도가 일었거든 사랑이다. 높다란 물너울의 중심 속으로 제 눈길의 초점이 맺혔거든, 거기 이 세상을 한꺼번에 달려온 모든 시간의 결정과도 같았을, 그런 일순과의 마주침이라면, 이런 이런, 그렇게는 꼼짝없이 사랑이다.
오래전에 비롯되었을 시작의 도착이 바로 사랑이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손가락 빗질인 양 쓸어 올려보다가, 목을 꺾고 정지한 아득한 바라봄이 사랑이다.
사랑에는 한사코 진한 냄새가 배어 있어서, 구름에라도 실려오는 실낱같은 향기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랑이다. 갈 수 없어도 사랑이다. 魂이라도 그쪽으로 머릴 두려는 그 아픔이 사랑이다.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
정윤천 시인 / 꽃이 피는 나타샤
꽃들은 모두 나타샤에게서 태어나지
나타샤는 지명이 아닐 수도 있어 총을 든 군인의 이름이거나 수도원의 뾰족한 종탑 아래일 수도 있지
분명한 것은 나타샤가 나타난다는 데에 있어 그도 어차피 1월에서 12월 사이에 태어났을 거니까
해바라기처럼 길쭉한 걸음일 때도 있지 나타샤의 말투를 처음엔 잘 알아듣지 못할 수도 있지만 말 보다는 나타나기를 즐기는 나타샤
무거운 짐을 태운 트럭이 지나갈 때 공장에서 나온 남자들이 술집 안의 난로를 향해 함부로 이거나 세차게 쳐들어갈 때에도
나타샤는 조금씩 길어나지 그것은 나타샤 만의 좋은 버릇 중의 하나
입술에 연필을 문 정원사 아저씨가 나뭇가지에 빨간 새집을 매다는 커다란 집의 담장 안에서
지금까지 보다는 아름다워지게 될 거야 꽃이 피는 나타샤가 여기를 지니고 있는 동안에는.
-계간 『시산맥』 2024년 여름호 발표
정윤천 시인 / 말투
불현듯 당신이 곁에 없을 때 '허전해'라는 말이 모르는 사이에 새어 나올 때 그 말은 이미 입술의 말이 아니다 견딜 수 없는, 몸이 지르던 소리 그렇게 어깨 한쪽이 시큰하게 결려올 때도 몸은 벌써 모로 누워서 뒤채인 잠 못이룬 어제의 시간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일이 그런 것이다 서로를 반드시 기억하는 일이다
내가 보낸말로 네가 다시 부쳐 온 말을 읽는 시간
당신의 말투는 그 사이에 벌써 내 말 버릇마저 닮아 있다
사랑이여 우리는 같은 목청으로 다투고 같은 음계로 운다
정윤천 시인 / 사과를 깎는 저녁
너와 헤어지고 온 저녁에 사과를 깎는다
생각해보니 그동안은 무심코 베어 먹었던 사과
먹다 남은깡치를 아무렇게나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을 사과를 깎는다
접시에 두 쪽으로 갈라놓고 났더니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하는 우리 사이를 떠올리게 해주던 사과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내려다보게 했던 사과를 한조각만 입으로 가져가 본다
너를 보내 놓고 혼자서만 돌아왔던 저녁에 접시에 오래도록 한 조각이 남아 있었던
사과를 깎았던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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