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천순 시인 / 뜨거운 글자
책속에서 글자들이 꼼지락거린다 물의 온도를 마신다 글자 몇 개가 온기와 함께 몸속으로 흘러든다 따뜻해진 글자가 흘러가는 목덜미가 후끈거린다 뜨거운 글자가 하나씩 일어나는 아침 오른쪽 눈으로 들어오는 글자가 선명하게 반짝거린다 왼쪽 눈으로 들어오는 글자는 흐릿하고 눈물이 번져있다 내 왼쪽과 오른쪽은 이렇게 달라 어느 쪽이 진짜 나인지 알 수가 없다 내 왼쪽과 오른쪽은 이렇게 달라 어느 눈으로 들어오는 네가 내 곁에 머무는 진짜 너인지 알 수가 없다 뜨겁게 다가오는 글자 하나 꼭 안고 아침을 저만치 밀어둔다 .
박천순 시인 / 밤낚시
어둠속에 낚싯대를 던진다 졸다 깨다, 어둠이 화들짝 놀란다
단어 하나 건진다 어절 하나 낚는다 흰 포말에 헹궈서 이리저리 꿰어 맞춘다
새벽은 온다 처음 보는 물고기 하나 기이하다
아침이 갸우뚱 한다 갸우뚱이 하하 웃는다
-<시와세계> 2020 겨울호 수록
박천순 시인 / 어스름이 내릴 무렵
비바람 분다 야자나무 큰 잎들이 휘어진다 흔들린다 비가 잘게 부서진다 흩어진다 빗속에서 물은 안개다 온수를 흘려보내주는 호텔전용비치 가두어놓은 바다엔 파도가 없다 잔물결만 몸을 간지럽힌다 왠지 싱겁다 흐린 하늘도 물속에서 소극적이다 "바다"라고 불러주기가 어색해진다 빗소리의 반은 물에 빠지고 반은 수면 위에서 튀어 오른다 소리가 물결에 몸을 맡긴다 어둠이 밀려올 때 소라가 물가로 밀려온다 풀어놓았던 귓바퀴를 거둔다 젊음에 어스름이 내릴 무렵
-<문학 秀> 2020. 7,8월호 수록.
박천순 시인 / 삽시도
물결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숨 쉬고 싶을 거야, 모로 누운 몸 사이로 은빛 멸치 떼 물살을 가르고 튀어오른다
참았던 숨을 내쉬어 보자 비늘이 있다면, 온기가 있다면 더 잘 자랄 거야 바다는 토닥토닥 물결뚜껑을 매만진다 햇살 따라 장독 덮개를 갈무리하던 어머니처럼
간밤 비에 말갛게 닦인 바다가 빛난다 이제 곧 하얀 포말 꽃이 필 테고 깊은 바닥 층층 물고기 떼 분주해질 거다 나는 폭신한 해변을 걸으며 마음껏 상상한다
오늘의 물결 아래 어제의 물결, 작년의 물결, 그 이전의 물결, 맨 밑의 물결 시간이 건너갈 때마다 무거워진 어깨를 무너뜨리고 누웠을 거다
숨소리가 멎고 숨소리가 바닥이 되고 숨소리가 먹이가 되는
방금 잡은 멸치 하나 손바닥에 놓고 들여다본다 너무 꼿꼿해서 아프구나
죽음과 생명이 끊임없이 몸을 바꾸고 푸르게 푸르게 익어가는 바다 이 많은 숨소리의 환생이 너무 눈부셔서 아프구나
-2020 보령해변시인학교 수상작품집 수록
박천순 시인 / 지하철 안에 사람들이
모판의 모처럼 빼곡하다
오늘은 어디를 돌아오는지 넓은 세상에서 지친 사람들 졸며, 꿈꾸며, 비틀거리며
지하철이 숨을 고를 때마다 모들은 일제히 한 방향으로 쓰러졌다 일어난다
박천순 시인 / 하롱베이*
첩첩의 섬들이 저녁 어스름 속에서 순한 짐승처럼 엎드려 있다 서로의 급소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발톱을 모두 물속 깊이 숨기고 가만가만 숨을 고르고 있다
어두워질수록 섬은 점점 폐활량을 늘린다 전설들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섬도 나도 서로의 기척에 놀라는 시간 가까이 가면 섬의 몸에서 별빛 같은 소름이 피어난다
등대도 필요 없는 섬과 섬 사이 배들이 말줄임표처럼 떠서 전등 빛을 내뿜고 있다 불빛에 닿은 섬의 입김들 바다 위에 엷은 안개를 풀어놓는다 물결은 섬 사이로 더 깊숙이 파고들고 호흡이 촘촘해지는 섬의 등허리
자고나면 또 하나의 전설이 생긴 것 같은 신비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이것이 하롱베이가 수천 년 동안 살아온 방식이다
*베트남 북부에 있는 만(灣). 1,969개의 크고 작은 섬 및 석회암 기둥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박천순 시인 / 나를 흐르게 하는
홍매 향 물고 가는 멧새의 등을 봅니다 웅덩이 부풀리는 도롱뇽 알집을 지나 섬진강가에 내려섭니다
외줄기 강물은 여러 길로 지나온 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니,
돌멩이 하나 던져 봅니다 활짝 솟구치다가 이내 잠잠해지는 물비린내가 둥글게 주름 잡히기도 전에 돌은 강과 한 몸이 됩니다 길쭉 삐뚜름한 둥근 돌들이 강물을 받치고 흐르게 합니다
나를 흐르게 하고 나를 꽃 피운 그대 수많은 눈물의 기항지 지나 무거운 그리움의 닻 내리며 여기까지 왔으니
이 강가, 마른 억새들의 밑동이 간지럽도록 이팝꽃으로 흐드러져 흘러가렵니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임경묵 시인 / 개똥과 나비 외 6편 (0) | 2026.01.07 |
|---|---|
| 문설 시인 / 옐로스톤 해빙기 외 9편 (0) | 2026.01.07 |
| 김남희 시인 / 일흔 즈음에 외 6편 (0) | 2026.01.07 |
| 정윤천 시인 / 안쪽을 위하여 외 5편 (0) | 2026.01.06 |
| 백인덕 시인 / 시인 투정 외 6편 (0) | 2026.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