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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묵 시인 / 개똥과 나비
개똥 위에 나비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이런 향기는 생전 처음 맡아 본다는 듯 혀끝을 감도는 괜찮은 맛이라도 있는지 둘러봐야겠다는 듯 날개를 접고 구릿빛 똥을 이리저리 더듬고 있다 나비는 당분간 숲으로 돌아가지 않을 모양이다
개똥은 자기가 지금, 바로, 여기, 꽃이라는 듯 이 정도 향기면 어디 내놔도 주목받지 않겠냐는 듯 양지편 개나리 울타리 아래 뭉긋하게 앉아 나비의 손과 입술에 무량으로 제 몸을 주고 있다.
임경묵 시인 / 소금쟁이
물의 거죽이 커터 칼날처럼 반짝인다
가라앉고 싶어도 가라앉을 수 없는 슬픔의 표면장력으로 한 발 한 발 물 위를 걷는다 물 위는 절망과 두려움에 주저앉지 않으려고 몸이 물보다 가벼워진 이가 홀로 걷기 좋은 곳
-『경향신문/詩想과 세상』 2022.07.25.
임경묵 시인 / 검은 앵무새
검은 앵무새를 찾습니다.
노랑뺨초록앵무, 붉은귀앵무, 풀빛허리앵무, 푸른부채꼬리앵무, 검은부리오색앵무, 레인보우앵무, 잿빛목도리앵무, 청머리붉은날개앵무, 긴꼬리파랑가슴앵무도 있습니다만…….
검은 앵무새를 찾습니다.
검은 앵무새의 섬에 가려면 발로 노 젓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바다 날씨라는 게 워 낙 종잡을 수가 없어서요. 무엇보다 꼼꼼히 바다를 저을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검은 앵무새를 찾습니다.
발로 노 젓는 사람을 만나려면 손으로 노 젓는 사람 배를 타야 합니다. 발로 노 젓는 사람은 적도의 상어에게 두 팔을 주고부터 검은 앵무새가 그의 어깨에 앉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구요.
검은 앵무새를 찾습니다.
발로 노 젓는 사람과 손으로 노 젓는 사람은 은폐술이 뛰어나 평소에는 보일 듯 보이지 않죠. 손으로 노 젓는 사람만이 발로 노 젓는 사람을 부를 수 있습니다.
당신은 검은 앵무새입니까?
* 인도양 세이셸 군도의 프랄린(praslin island)에 검은 앵무새의 서식지가 있다.
임경묵 시인 / 푸드 트럭
사내는 꽤 점잖은 편이다 매직펜으로 반듯하게 쓴 〈토스트+우유=2500원〉 피켓을 들고 트럭 옆에서 지나는 차들을 향해 공손하게 서 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여자가 트럭 안에서 식빵을 굽는다
외곽에 딸린 변전소 앞길은 공단 가는 지름길, 키다리 송전탑들이 고압적인 자세로 이곳을 지나는 차들과 전봇대에 대충 기댄 푸드 트럭을 내려다보고 있다
빗방을이 굵어졌다 사내는 왼손엔 피켓을 오른손엔 우산을 들고 식빵을 굽는 여자 옆에서 다시 마네킹처럼 서 있다
팬에 노릇노릇 구워진 식빵을 뒤집으며 여자는 가끔 목을 길게 빼고 도로를 내다본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 차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다 서기를 반복한다 밀린 주문은 없다.
임경묵 시인 / 하모니카를 불어 주세요
아버지가 툇마루에 한갓지게 앉아 하모니카를 붑니다 입술이 하모니카에 잘 미끄러지게 침을 쭈욱 바르면서 도-레-미-파-솔-라-시-도 도-시-라-솔-파-미-레-도 두 손으로 하모니카를 포옥 감싸고 입술을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풍잣 풍잣 리듬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풍자자 풍잣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풍잣 풍잣 아버지 태어난 곳은 연기군 남면 양화리 66번지 행정수도가 들어선다고 집도, 집터도, 뒷간도, 뒷간 옆 돼지우리도, 뒤란도, 뒤란의 정구지밭도, 장독대도, 장독대 옆 고욤나무도 다 사라지고 주소만 홀로 남아 세종시 연기면 세종리 66번지 옛적 강경의 새우젓 배가 부여에서 백마강과 반갑게 손잡고 공주, 연기로 거슬러오다가 장남 평야 끄트머리 앵청이나루와 만나던 곳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속에서 놀던-때가 그립습니-다 풍자자 풍잣
아버지, 보청기 하러 내일 대전에 갈 거예요 오늘은 일찍 주무셔 마루 모서리에 하모니카를 탁탁 털어 구멍에 고인 침을 빼고 가래 한 번 칵 뱉고 다시 하모니카를 부시는 아버지 풍잣풍잣 밤깊은-마포종점 갈곳없는 밤-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곳없는-나도 섰--다 풍자자 풍잣
비 와요, 주무셔요
임경묵 시인 / 해시海市*
폐사지 입구 천년 느티나무 아래 누워 수천수만 가지 사이로 산란하는 하늘을 본다
그 속에 장날 오후 시장 골목이 부레처럼 떠 있고 망국의 부족 같은 장발의 폭주족이 비밀스럽게 들락거리는 오토바이 불법 개조 수리점이 얼핏 보이고 부모도 저버리고 아내와 자식도 팽개치고 술에 취해 천지간을 건달바처럼 떠돌다가 어디 한뎃잠을 자다 죽었다는 서른여섯 막냇삼촌이 오토바이를 타고 시장 골목을 미끄러지듯 빠져나오고 있다
천년 느티나무, 하늘과 맞닿아 숨기 좋은 곳 하늘과 맞닿아 머언 바다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가기 좋은 곳 저 나무 속에 막냇삼촌이 세운 망명정부가 있었구나
바람 불자 미로처럼 뻗은 가지마다 하늘 향해 일제히 부릉부릉 시동을 켜는 수천수만의 푸른 이파리들.
*신기루
임경묵 시인 / 제비꽃과 내 그림자
달빛이나 꽤 주려고 데리고 나온 내 그림자가 우체통 옆 제비꽃에 귓속말을 건넵니다
제비꽃은 사는 곳이 열 군데도 넘는다지 그린빌라 101동 화단에, 천냥 국숫집 문 앞에, 낙원교회 담벼락에, 주인아줌마가 폭 쏟아버린 화분 흙 속에, 등산로 입구 풀벌레 울음소리 옆에, 그리고 내 옥탑방 오르는 첫 계단........
그중 대부분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었고 나와 내 그림자처럼 달빛을 쬐는 제비꽃은 이제 셋이나 넷
직업소개소와 편의점이 마주 보는 골목 입구 언제나 가르랑대며 나를 마중하던 가로등 아래 서면 나도, 내 그림자도 문득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나는데 제비꽃 그림자는 우체통에 기대앉아 제비꽃 피울 생각만 하는군요
한 번도 내 생활을 간섭한 적 없는 내 그림자가 오늘은 내가 끄적이다 구겨버린 입사지원서를 가져와 제비꽃에 건넵니다 제비꽃은 그걸 제비꽃 그림자에 건네고, 제비꽃 그림자는 우체통 그림자에, 우체통은 그림자는 그걸 우체통에 건네고요
이런 그림자놀이를 상상하며 자꾸 걷다 보면 나와 말라깽이 내 그림자가 세계의 제비 꽃을 다 만날 수도 있겠습니다 지구는 둥그니까요
무연고 그림자의 은신처인 이 골목에서 제비꽃과 제비꽃 그림자 우체통과 우체통 그림자 가로등과 가로등 그림자 나와 내 그림자 위에 달빛 한 줌 흩뿌리면 제비꽃 설탕 절임처럼 달콤한 토요일 밤이 될 것 같아 보랏빛 제비꽃을 피우지 않아도 오늘만은 제비꽃을 제비꽃이라 불러봅니다
그런데, 제비꽃이 가져간 수취인 불명 내 입사지원서는 언제쯤 나에게 반송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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